후회를 되새김질하면서 슬퍼하고, 과거의 상황을 변화시키려고 시도한다
물에 젖은 스펀지처럼 몸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다. 아마, 잦아들 것 같았던 코로나-19가 다시 고개를 쳐드는 영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이 무거울 때는 이내 생각을 고쳐 봅니다.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고요. 희망을 꺼버리지 말라고요. 어떤 경우이든 행복과 희망은 우리 곁에서 비껴 나 있지 않다고요.
오늘도 변함없이 해가 떠올랐습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습니다.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새들이 날고 있었고요. 높은 비행 속에서 먼 곳을 지향하는 새들의 자유가 부러웠습니다. 세상의 공간은 여기저기서 자유가 넘치고 있지만, 지금은 굵은 벽과 높은 담들로 막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드는 하루하루의 일상들이지만 자신을 토닥거려 봅니다. 토닥토닥. 자신한테 감동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을 스스로 힘껏 안아 주기도 하면서요. 자신한테 감동을 받는 것은 자존과 사랑일 테지요. 불현듯 사기(司記)에 나온 글이 떠오릅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면 더욱더 높아진다’.
요즘 나에게 큰 아픔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십니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다섯 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무작정 걷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사람들은 걱정이 많아 방황하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고통도 삶이니, 삶으로의 여행 정도라고 말했습니다. 이곳저곳을 걷다가, 적당한 장소에서는 앉아 쉬다가,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방황이라고, 사람들이 대놓고 우겼습니다.
많이 아파하지 말라는 의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픈데 아파하지 말라는 것에 대한 반항 같은 거였습니다. 새가 나는 것, 나비가 나는 것, 그것도 방황이냐고 소리쳤습니다. “새들은 자유를 찾고, 나비는 꽃을 찾아 날아가는데, 그것이 어찌 방황이냐고!”라고.
꽃만이 꽃이 아닙니다. 돌도 풀도 담벼락도 나의 눈에는 모두 꽃입니다. 숨을 쉬고, 살아 있는 그 순간은 사람도 꽃입니다.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향기가 나거나 악취가 나거나, 그것은 자신의 몫이지만 말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라는데, 엄마는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어릴 적 마음속에는 항상 졸졸졸 작은 시냇물이 흘렀습니다. 그곳에서 가재와 물고기를 잡으면서 놀았습니다. 조약돌을 골라 소꿉장난도 했고요. 물가 한편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누이에게는 조막손이지만 가장 많은 양의 물을 두 손안에 담아 뿌리기도 했고요. 추억이 가득한 시냇물의 향수(鄕愁)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음의 시냇물은 기억과 추억과 이야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마음의 강(江)을 만들곤 합니다. 마음의 강은 어른이 될수록 깊어집니다. 추억이 쌓여 있는 강일수도 있고, 후회와 고뇌의 강일 수도 있습니다. 고뇌와 번민의 강에는 온통 암울한 것들,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난해한 과제들만 가득 차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이 훼손되듯이 마음의 강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두운 색이 짙어집니다. 마음의 강이 자신을 지켜 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거의 매일 엄마의 면회를 위하여 오전 10시까지 중환자실 앞에서 대기합니다. 나 말고도 제법 많은 보호자들이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모여듭니다. 간절하게 기도를 하는 사람,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 남들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털끝 같은 정보라도 얻으려는 사람 등. 모두가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강이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강물에 불행을 씻어내려고 하겠지요. 강물을 희망의 씨앗에 쏟아붓고는 새싹이 돋아나게끔 애를 쓰겠지요. 하지만 마음의 강물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게 됩니다. 간절함 앞에서 후회와 반성과 참회의 눈물이 터져 나오기 때문이지요.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에 대해 더 많이 후회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마이애미대학의 에이미 섬머빌 교수는 “사람들은 이미 했던 행동에 대한 후회가 더 많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섬머빌 교수는 “후회에 관한 유명한 연구들이 긴 시간을 전제해서 이루 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짧은 순간을 전제로 삼는다면 오히려 저지른 행동에 대해 더 후회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후회연구소를 운영하는 섬머빌 교수는 ‘반추’라는 심리학 용어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반추는 후회가 끊임없이 재생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소화기(消化器) 용어에서 파생된 반추는 ‘후회를 되새김질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사람들은 후회를 되새김질하면서 슬픔을 느끼고, 과거의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섬머빌 교수는 “반추는 원치 않는 생각이 마음에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 얻는 것 없이 계속 생각들을 되새긴다. 이는 계속 반복되며 우리 정신의 풍경으로 자리 잡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반추를 자주 하는 사람들이 가장 부정적인 기분을 느낀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바로 중환자실 앞 풍경이 그렇습니다. 반추의 연속입니다. 슬퍼하고, 나아가 현실을 바꿔보려고 뒤늦게 열심입니다. 하지만 질병이라는 것은 신념으로 고쳐지는 것이 아니지요. 의학으로만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후회가 연속되면서 마음의 강에서 희망의 싹을 틔어 보자는 것이겠지요.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따르다고 했으니 여전히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존경하는 교수님 한 분이 계십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전문 분야로, 대학원 박사과정의 지도교수님이셨습니다. 가끔 제자들의 주례를 서주시곤 하는데, 지난번 주례 과정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해주시더군요.
“주례를 하면서 ‘자주 다투라’고 했어. 순간, 좋은 생각만 하고 오신 하객들에게 실례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더군. 이내 ‘서로 싸우되 논쟁을 하고, 싸움을 다른 공간으로 옮겨가지 말고, 미안하다는 말을 서둘러 먼저 하자’라고 주례사를 이어갔지 뭔가.
꼭 이 사람이 배우자여야 행복할 수 있다는 확신범 부부이니 살아가면서 의견이 갈리는 상황에서는 일방적인 완승을 노리지 말고 적극적인 의사교환 과정을 거쳐서 결정하는 지혜를 발휘하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던 거야, 나는.”
말씀을 마치면서 “하객들이 주례자의 심중을 헤아리지 않았겠냐?”며 다시 한번 안도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은 삶의 과정에서 정말 중요합니다. 논쟁이 결국 문제 해결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소통 만이 후회의 크기를 줄일 수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으로 반추의 효과를 높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의 마음과도 소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통을 통하여 마음의 강의 수심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홍수가 날까 가뭄이 들었나, 이것들을 확인하는 과정 말입니다.
예전에 <소통>이라는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시는 이렇습니다.
‘때로는 묵묵함이 커뮤니케이션이다/ 가끔은 외로움이 사랑의 실천이다/ 고독으로 무장하여 나를 표현하고/ 외롭다며 웃음 짓는 여유로움은 선물이다// 인생은 봄 하늘의 구름처럼 훌쩍 흘러간다/ 네 인생이 그렇고 내 인생이 그렇다/ 삶은 바람(風)이요 목적지 없는 여행이다/ 나댐보다는 기다림이 좋다/ 그래서 살만하다/.
마음의 강을 무리해서 건너려 하지 마세요. 강의 수심을 측정하고 나서 방법을 찾으세요. 그 강의 오염되지 않도록 마음과의 소통도 게을리하지 마시고요.
* 이 글은 지난해 6월에 작성했습니다. 엄마는 378일 동안 의식 없이 입원해 계셨습니다. 병원 규정 상 모두 5군데의 병원을 옮겨 다니셔야 했지요. 그러고는 올해 1월 27일 저녁 7시 무렵 사랑하는 가족 곁을 떠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