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은 시각,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하루키가 곁에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글은 편안하다. 활자가 잘 뚫린 신작로를 달려 바로 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다. 고색창연하게 말하면 무성영화 시절 변사의 해설 처럼 스토리와 등장인물의 대사들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글의 내용도 현실적이다.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천의무붕 처럼 매끄럽다.
‘나이 먹으면서 기묘하게 느끼는 게 있다면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한때 소년이었던 내가 어느새 고령자 소리를 듣는 나이대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나와 동년배였던 사람들이 이제 완전히 노인이 되어버렸다…… 특히 아름답고 발랄했던 여자애들에 지금은 아마 손주가 두셋 있을 마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몹시 신기할뿐더러 때로 서글퍼지기도 한다. 내 나이를 떠올리고 서들퍼지는 일은 거의 없지만.’
‘평소 슈트를 입을 기회는 거의 없다. 있어봐야 일 년에 고작 두세 번이다. 내가 슈트를 입지 않는 건 그런 옷차림을 꼭 해야하는 상황이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필요에 따라 캐주얼한 재킷을 입을 때믄 있지만, 넥타이까지 매진 않는다. 가죽구두를 신을 때도 거의 없다. 내가 스스로를 위해 선택한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적이기는 하지만, 그런 유의 인생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딱히 그럴 필요도 없는데 자진해서 슈트를 입고 넥타이까지 매볼 때가 있다. 왜 그런가? 옷장을 열고 어떤 옷이 있는지 점검하다가(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떤 옷을 가지고 있는지 잊어버리기에), 사놓고 거의 걸쳐보지 않은 슈트나, 세탁소 비닐에 싸인 드레스셔츠, 매본 자국 하나 없는 넥타이를 바라보는 사이 어쩐지 그 옷들에 ‘미안한’ 마음이 솟구쳐서, 시험삼이 잠깐 입어본다. 아직 잘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할 겸 넥타이도 몇 가지 방법으로 매본다. 딤플(보조개)도 만들어본다. 그러는 건 집에 혼자 있을 때뿐이다. 누가 보면 왜 이러는지 대충이라도 설명해야 하니까.’
이제 곧 하얀 눈이 복숭아뼈 높이까지 쌓여 있고, 차가운 공기에 볼살이 얼얼해질 때가 온다. 그러는 사이 바닥에 두터운 요를 깔고 온돌의 열기를 몸으로 받을 준비를 해야겠다. 차가운 귤을 까먹고, 따스한 커피로 입안의 냉기를 뎁혀야겠다.
미소가 얼굴을 떠나지 않고, 바람소리에도 신경쓰지 않고 읽을 수 있는 글이 하루키의 작품이다. 밤이 늦은 시각,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하루키가 곁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