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결국 자기반성이다. 눈물은 반성의 힘을 갖고 있다
1960년대, 지금의 <응답하라 1988> 만큼 인기가 많았던 영화가 있었다. 당시 최고의 미남 미녀 배우였던 윤정희와 최무룡, 남궁원이 주연한 이 영화의 제목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었다. 내용은 이렇다. 남녀 주인공은 그의 군 입대에 앞서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 입대 후 그가 전사(戰死)했다는 통지를 받고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그러나 죽었다던 그가 그녀의 시누이인 여자와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와 다른 남자는, 그녀와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티 없이 키웠지만. 이제는 그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이는 온갖 몸부림을 치며 그녀의 품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와의 사랑의 씨앗인 아이를 데리러 왔지만 눈물만 흘리고는 맥없이 발길을 돌리고 만다.
가수 나훈아는 이 영화의 주제가를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먼 훗날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않겠지요. 서로가 헤어지면 모두가 괴로워서 울테니까요.’ 당시 영화는 많은 사람을 울렸다.
공중화장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글이 있다. ‘남자가 흘릴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과연 그럴까! 우습기만 하다. 눈물과 오줌과의 비교는 옳지 않다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눈물과 오줌은 나오는 곳의 위치가 하늘과 땅 차이인데 말이다.
여성의 눈물은 남성의 마음을 약하게 한다고 하는데 이는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다고 한다. 남성들에게 여성의 눈물 냄새를 맡게 한 결과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의 분비가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테스토스테론은 남성의 폭력성과 공격성을 높이는데, 여성의 눈물로 인해 그 농도가 감소하면서 남성의 마음을 안정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눈물을 어찌 지린내 가는 오줌과 비교할 수 있는가. 오줌이 노폐물이라면 눈물은 이물질을 씻어내는 차원이 다른 물이다. 눈물은 무기가 되고 마음이 되고 사랑이 된다.
일본의 한 말기암 환자는 한국 드라마 겨울연가를 보고 한 없이 눈물을 흘렸다. 매일 같이 드라마를 보면서 흘린 눈물의 효과로 암세포가 말끔히 사라졌다. 사실이다. 그래서 한 때 일본에서는 눈물치료 신드롬이 생겼고, 함께 모여 울기 모임인 ‘루이카쓰(淚活)’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우리나라에도 눈물로 암을 치료한 기록들이 많다. 눈물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눈물샘을 통하여 방출한다. 눈물은 신경전달물질인 엔도르핀, 세로토닌, 다이들핀의 분비를 촉진한다. 이런 분비물들은 선천성 면역세포를 두 배 이상 증가시킨다. 암세포는 생기면 선천성 면역세포가 초기에 진압하는 작용을 한다. 눈물의 효과이다.
눈물에는 거대한 힘이 숨겨져 있다. 특히 아버지의 눈물이 그렇다. 시인 최연근의 시 <백두산의 눈물>은 이렇다. ‘불이더냐 별이더냐/ 감당 못할 반역이냐/ 끓어오르는 분노를 꼬깃꼬깃 감췄어도/ 아 그대 시퍼런 불씨 안고 몰아쉬는 함성이다/ 바람이냐 환청이냐/ 묵언으로 버틴 비명/ 넝마 같은 마음을 갈래 갈래 찢었어도/ 천지는 지그시 참고 있는 아버지의 눈물이다/. 민족의 영산에 있는 성스러운 하늘못 천지를 지긋한 인내로 인고의 삶을 살아온 아버지의 눈물과 비유한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의 눈물은 고뇌의 역사요 인내의 사리(舍利)라고 할 수 있다.
결코 자신은 눈물을 흘릴 것 같지 않은, 오히려 남을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할 것 같은, 그 법정스님이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가난한 집안에서 대학을 중퇴하고 절에 들어갈 때 집에 홀로 남은 할머니와 누이를 위해 흘린 눈물이다. 누구보다 인간적인 사랑을 뜨겁게 나누어주었던 샘물과 같은 눈물이었다. 보석의 눈물이다.
나의 장인은 눈물이 많았다. 살아온 삶의 고통들이 몸 속에서 마치 선인장의 수분처럼 쌓였던 모양이다. 선인장의 가시로 가족을 보호하면서 자신의 울분은 고스란히 굵은 줄기 속에 물로 채워 놓은 탓이다. 아내는 장인의 눈물이 싫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삶의 후회처럼 비춰졌기 때문이란다.
“가진 것 없는 한 남자가 있었다. 삶의 무게가 커다란 납덩이만큼 자신을 제압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가족 앞에서 무슨 일이던지 해야 했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아니 가족들을 잘 입히고 잘 먹이기 위해서. 사업이란 흥하기보다 망하는 확률이 훨씬 높다. 망하면 쪽박을 차야 한다. 살아가는 주변의 곳곳에는 큰 입을 벌리고 기회를 기다리는 악어들 천지다.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날이 온다 해도 세상과의 단절은 겁나지 않지만 이 세상에 남을 가족 걱정으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러한 인생이 반평생이다. 한 남자의 삶이 이 정도라면, 공기 속에 섞여 있는 한숨 소리가 수분으로 변해 고스란히 몸 속으로 들어와서 그는 이미 젖은 스폰지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아비의 눈물은 감성의 눈물이 아니라 회한의 눈물인 것이요.” 라고, 또 다른 아빠인 나는 길게 설명했고, 아내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아버지의 눈물처럼 그렇게.
‘눈물은 사랑이다. 사랑하지 않고는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한다. 눈물은 존재감이다. 눈물을 흘릴 때 외로움보다는 존재의 이유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물은 사명(使命)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을 살아감을 눈물이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생각은 눈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고, 생각을 바탕으로 목표가 만들어지고, 목표를 바탕으로 의지가 만들어지고, 의지를 바탕으로 신념이 만들어진다.’ 이것은 눈물의 목소리이다.
인정이 많으면 눈물이 많다는 말이 있다. 인정은 사랑이다. 사랑은 독(獨)으로부터 벗어나는 희망의 경지를 말한다. 하지만 독(獨)은 베풀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바로 실행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맑은 눈물 뒤에 조용한 미소는 얼마나 오묘한 조합인가. 혼을 다해 울어보면 끄떡 않던 마음의 얼음이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들려오지 않았던 세상의 온갖 무소식들이 희소식처럼 다가올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눈물의 배려이다. 눈물은 실행의 에너지이다.
법정 스님의 <일기일회>에 나오는 글이다. 어느 날 아주머니 한 분이 법정스님을 찾았다. 그녀는 눈물로 호소했다. “남편이 너무 나를 무시하고 자기이익만 챙겨요. 무뚝뚝하기는 저리 가라고요. 그래서 밥도 해주기 싫고 얼굴을 마주보기도 싫어요. 정이 뚝 떨어져 이혼하려고 합니다.” 법정 스님이 말했다. “딱 2년만 부처님에게 공양한다고 생각하고 남편에게 밥해주고, 직장에서 돌아오면 부처님 맞이하듯이 남편을 맞이해보세요.”
눈물은 결국 자기반성이다. 자기의 반성을 통하여 상대방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눈물은 반성의 힘을 갖고 있다.
사람은 눈물을 흘리고 나면 오히려 평정심을 찾을 때가 많다. 행복과 쾌락이 삶의 에너지라면 눈물은 나를 비켜놓았던 세상 속으로 나 자신을 다시 끌어들이는 매개자이다. 보들레르는 “슬픔이 옛날을 되돌아보고 미소하는 회한을 거둬들인다.”고 말했다. 결국 눈물은 내일의 희망 처럼 자신을 돌봐 준다.
온갖 기대감으로 시작했던 새해가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이 시기쯤이면 대입 수험생들은 기쁨 또는 슬픔의 눈물을 흘릴 때이고,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들은 정든 학교와 선생님과의 이별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때이다. 기대만큼 시작의 힘이 작다고 느껴지면 바로 지금 눈물을 흘려라. 눈물을 흘릴 각본을 만들어라. 눈물은 흘리고 나면 가슴이 벅차오르고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갈 의욕이 불타오를 것이다. ‘Don’t Cry’가 아니라 ‘Just Cry’를 새해인 이 시점에서 자신한테 가장 가까이 둘 인생의 경구(警句)로 만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