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설렘으로 다가오듯이 나는 누구의 설렘이어야 한다
공중전화가 절실할 때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을 때 바람만큼 묵직한 공중전화를 만나곤 했다. 누구로부터 무슨 말을 듣고 싶을 때도 얼음처럼 차가운 부스에서 그리운 사람을 만났던 시절이었다. 누구한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도 냉큼 다가가서 먼저 고백을 했다.
그 시절 공중전화는 ‘너’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꽃을 받게 해주었다. 밤별만큼 반짝거리도록 환한 희망을 건네받은 적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설렘의 주고받음이었다. 그래서 힘들 때나 행복할 때나 그리울 때면 언제든 찾아오라 했고, 또 찾아갔었다. 조그맣게 속삭이는 그 누구의 목소리가 공중전화를 통해 내게로 오기도 했었다.
설렘이 가득한 만남을 위해 항상 기다려주는 공중전화는 힘을 나게 하는 샘물과 같았다. 지금 오렌지색 공중전화의 그리움은 고향을 향한 마음과도 같다. 전화 부스 안에서 살짝 미소를 지으며 성우처럼 중저음의 무게감으로 대화를 나눴던 것. 그야말로 ‘3분’의 설렘이었다.
이제 공중전화를 통한 설렘이 사라진지 오래다. 내 몸을 떠나버린, 공중전화 부스에서의 설렘은 연인을 떠나보낸 외로움처럼 슬프기만 하다. 설레지 않으면 미동도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바야흐로 설렘의 계절이 온다. 왠지 그리웠던 사람을 다시 만날 것 같은... 꽃들을 찾아 어디든 가고 싶어지는... 설렘으로 훌쩍 떠날 수 있고, 설렘으로 용기를 낼 수 있는... 설렘의 태동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만들어준다. 바로 봄날의 설렘이다.
사람들은 ‘거창한 삶을 살았으면’ 하고 바란다. 현실은 막막함에도 마음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세상은 녹록치 않다. 좌표가 사라진 것 같고 이정표는 탈색되어 글씨마저 희미하다. 주머니 사정이 어려우니 삶은 팍팍하다. 가야할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건, 그것은 설렘이 살아있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어려워도 찾아서 간직해야 할 무엇이 있다. 꿈과 희망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세상살이가 그렇다. 좋은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고, 가슴 아픈 일도 있고, 화나는 일도 있다. 삶이 달달하기만 하다면, 설탕으로 요리할 수 있는 삶이라면, 그것은 가면 속의 삶이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오고 있는 빛이 있다. 그것은 희망을 꿈꾸는 것이고, 그래서 꿈을 꾸면 항상 설렘이 넘치게 된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꿈은 자꾸 꾸어야 ‘다음 꿈’을 꿀 수 있다.
사람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정서는 그리움이라고 한다. 나태주 시인은 <추억>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디라 없이 문득 길 떠나고픈 마음이 있다/ 누구라 없이 울컥 만나고픈 얼굴이 있다/ 반드시 까닭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분명히 할 말이 있었던 것은 더욱 아니다/ 푸른 풀밭이 자라서 가슴 속에 붉은 꽃이 피어서/ 간절히 머리 조아려 그걸 한사코 보여주고 싶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그리움은 환희와 감사의 산물이다. 분노와 원망 만 가득한 곳(사람)이 그리울 리가 없기 때문이다. 기쁨의 기억을 찾아가고, 고마움의 기억을 찾아가는 것이 곧 그리움이다. 그래서 그리움의 기억은 곧 설렘이다. 그리워서 설레고, 설레니 그리운 법이다.
시간은 흘러간다. 시간의 흐름은 사람의 마음을 간섭한다. 다짐과 결심을 잉태했다가 해이와 안일을 출산할 때가 있다. 제법 많다. 시간이 마음 사이로 빠져나간다. 잡을 수 없는 바람과 같다. 먼지가 쌓이듯이 후회와 번민 만 기록된다. 지금도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우리는 설레고 설레야한다.
시간을 돌아 볼 수 있는 것은 여행이다. 그것이야말로 여행의 설렘이다. 철들지 않는 노년처럼, 또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기뻐 뛰던 아이처럼 행복하다. 여행이 인생의 궤적을 바꿔 놓았다는 이도 있다. 여행이 닫힌 문을 열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행이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 바로 ‘메시지’다. 인생을 돌아보고 의미를 찾아주는 것 말이다. 그래서 여행은 위대하고, 그래서 더 설렌다. 여행은 내가 구경하는 것 뿐 아니라 나를 세상에 구경시켜준다.
생각만으로 설레어 본 적이 있는가. 일본의 저명한 스님이 쓴 <생각버리기 연습>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적이 있다. 책 속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이미 생각을 시작해버렸다면 느끼는 쪽으로 방향을 바꿔줘야 한다. 생각의 강도에 따라 실감의 강도를 의도적으로 높이다 보면, 사고와 잡념은 완전히 가라앉게 된다.”
생각은 그야말로 사고(思考)의 원인을 찾아내는 데 집중해야 한다. 법인 스님은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이라는 책에서 “‘괜찮다’고 덮어둘 것이 아니라 후벼 파서 그 내면을 바로 봐야 한다. 사유가 발생하고 ‘내’가 삶의 주체로 서는 순간이 바로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다.”라고 했다.
법인 스님의 사(思)생활 비법 중에 이런 게 있다. ‘물어라. 묻지 않으면 길은 열리지 않는다’. 곧 생각은 지혜의 경지와 고뇌의 해탈을 가져다준다. 마음이 잔뜩 설레도록 생각하는 것, 바로 회복과 건강의 과정이다. 설렘이 생각을 다스려준다.
수영을 해 본 사람을 알거다. 쳐 놓은 라인을 따라 왔다 갔다 한다. 옆 라인으로 옮겨 갈 수 없다. 출발점에서부터 도착점까지 한 개 라인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삶이란 말이다. 라인이 없다. 갇혀 있는 삶은 죽은 것과 같다. 그러니 라인으로 세팅된 삶은 살아도 재미가 없다. 설렘도 당연히 없다.
삶의 지혜는 바로 설렘으로 자극하는 것이다. 그것이 고체처럼 굳어있는 삶을 살아 숨 쉬게 하는 방법이다. 세상 앞에서 두려움을 작게 하고, 남을 의식하지 않고 포효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바로 몸 안에서 꿈틀대는 설렘이다.
요즘 술자리를 피하고 있다. 무슨 잇속이 있을 때 술을 마시는 상주(商酒)의 자리가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잠이 안 와 마시는 수주(睡酒)도 필요 없기 때문도 아니다. 술자리에 초대를 받더라도 설레지 않기 때문이다. 설레지 않으니 움직이고 싶지 않다.
모든 인간에게 가장 먼 존재는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 있다. 성격학의 대가 브라이언 리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인간은 누구나 원래 성격에서 벗어나 행동하는, 제3의 본성인 자유특성을 가진다”고 했다. 이 자유특성은 개인의 인생 목표에서 나온다. 바로 삶의 목표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고, 나아가 행복하거나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소심해’라고 성격을 규정하면 그 기준에 스스로 갇힐 수 있다고 경고했다.
삶이 깊어질수록 설렘은 사라질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 ‘나는 설렌다’라고 규정하고, 설렘이라는 자유특성을 가져야 한다. 설렌다는 것은 변화이고 시작이다. 이제까지 살아온 삶,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할 나머지 삶. 모두 설렘이 있어야 행복하게 된다. 설레지 않는 삶은 죽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동양 고전 <소학(小學)>에 ‘봉생마중 불부자직(逢生麻中 不扶自直) 백사재니 불염자오(白沙在泥 不染自汚) 근묵자흑 근주자적(近墨者黑 近朱者赤) 거필택린 취필유덕(居必擇隣 就必有德)’이라는 구절이 있다. ‘마밭에 난 쑥은 세우지 않아도 곧게 서고, 흰 모래도 진흙을 만나면 물들이지 않아도 더러워진다.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지고 빨간 주사를 가까이 하면 붉어진다. 살 곳을 고를 때는 반드시 이웃을 살펴 반드시 덕이 있는 사람 쪽으로 가라’는 뜻이다.
설렘이 그렇다. 설렘은 주고받아야 한다. 주변이 설렘으로 가득 차야 한다. 설렘은 곧 사랑이다. 설렘을 주지도 받지도 않은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우리가 설렘을 제대로 주고, 받고, 또 갚으며 사는, 그래야 행복이 다가온다. 봄은 설렘으로 다가오듯이 나는 누구의 설렘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