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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통 Feb 18. 2022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무성영화(無聲映畵) 시대의 감동은 변사(辯士)가 이끌어냈다

법정 스님이야기로 시작한다. 올해가 열반 12주기다. 스님의 대표 저서 무소유>는 1976년 처음 발간됐다. 46년이 훌쩍 넘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책의 교훈은 잊혀지지 않고 있다. 


수록된 글 가운데 ‘침묵의 의미’가 있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별로 없고, 말은 오해를 동반한다고 했다. 또 ‘우리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씨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자꾸만 거칠고 천박하고 야비해져 가는 현상은 그만큼 내면이 헐벗고 있다는 증거’라고 꼬집었다. 침묵과 언어구사의 좋은 잣대가 될 법하다.


법정스님은 무조건 입을 닫는 것이 미덕은 아니라고도 했다.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할 때의 침묵은 비겁한 회피이고, 그것은 시대를 부정으로 얼룩지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옛날부터 말을 잘하면 빚까지 청산할 수 있다고 했다. 말 한마디의 창출 효과는 천양지차요 무궁무진하다는 의미일터. 


명심보감에 ‘구시상인부(口是傷人斧) 언시할설도(言是割舌刀)라는 말이 있다. 입을 잘못 놀리면 사람을 상처내는 도끼와 같고, 말을 잘못하면 내 혀를 베는 칼과 같다’는 말이다. 


심리학자 이토 아키라가 쓴 <할 말 다 해도 괜찮습니다>라는 책에는 이런 말도 있다. ‘한 마디를 우습게 여기면 인생을 망칠 위험성이 부쩍 올라간다. 한편 한 마디를 중요하게 여기면 그것은 인생에 커다란 선물을 안겨준다.’


말을 잘 하면 마음을 얻을 수 있다. 말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말을 통해 자신의 색깔이 밝혀진다. 


#과거 장면1.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기가 찼다. 답답함은 폭발했다. 그럼에도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하루 2번의 면회는 그저 혼자서 엄마를 불러보고, 손과 발을 주무르는 게 전부다. 옆에 있는 간호사한테 물었다. 환자를 수시로 접하는 간호사는 의사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는 말뿐이다.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사가 됐다. 나의 지식이 얼마나 비싼 건데… 아무 곳에 뿌릴 수 없지. 이 정도의 권위는 부릴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후배가 전화를 했다. 엄마의 상태를 물었다. “의식이 없는 여전한 상태이고, 의사는 만날 수도 없으니 들은 말도 없다.” 후배가 말했다. “선배, 그것은 어머니가 더 나빠지지 않고 현상 유지를 하고 있다는 의미예요. 의사들이 어떤 사람인데요. 만약이 상황이 나빠질 것 같으면 바로 보호자들을 호출할 거예요. 그것이 의사들의 면피 전략입니다.”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과거 장면2. 사업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고객의 목소리를 직접 듣게 된다. 거래처 총무팀의 김 과장이 나를 불렀다. 조용히 말을 건네 왔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온전히 당신을 위해서야!’라는 압박의 힘이 느껴졌다. 

(어떤 직원을 가리키며) “저 분은 여기서 그만 두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고객을 맞이하면서 뱉어 내는 말들이 도통 내 귀까지 도달되지가 않아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뭐라고 하는건지,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답답함을 넘어서요. 짜증까지 나게 해요. 분명 문제가 있는거죠. 그쵸, 사장님?”

핵심을 찔렀다. 같은 이유로 몇차례 불만이 들어왔지만 성격의 탓으로 돌렸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직원을 불렀다. “이런 불만이 들어왔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기대가 크지는 않았다. 습관이고 성격 탓이라 여겼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면서 몸에 붙은 습성이었다. 그것을 고친다는 것은 본인의 어색함을 이겨내야 한다. 굳은 살처럼 딱딱하게 뿌리내린 옹이를 흔들어야 한다. 그후, 그의 언어 태도는 조금씩 좋아졌다. 만족은 이상(理想)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여전히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침묵이 금(金)일 때가 있다. 하지만 자주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침묵의 장기화는 곧 죽음을 의미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말을 해야 하고, 주고받아야 한다. 살아있다는 것을 입증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말을 아껴야 할 때가 있다. 변명이거나 논리적 범위 밖에 있을 때다. 어떤 경우이든 소통의 기본은 소리로 이루어졌다. 배가 고프거나 어딘가 불편한 아가가 울음으로 욕구를 표현하듯이. 그래서 소리가 없는 대화는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없다. 무성영화(無聲映畵) 시대의 감동은 변사(辯士)가 이끌어냈다.


소리에도 갑을(甲乙) 관계가 있다. 금전이나 시간을 지불한 만큼 그에 따른 답변을 원하는 위치가 갑이다. 그 반대의 위치가 을의 입장이 된다. 하지만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뀌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을의 권력이 답변을 해야 하는 갑보다 우세한 경우가 그렇다. 이 경우에 갑은 답변을 주장하거나 요구하지 못한다. 그저 기다릴 뿐이다. 언어를 통한 대화에서 갑과 을이 생성되면 탈이 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결과는 인간 관계의 이탈이나 폭력의 행사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고자 한다면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 물론 이기적일 필요는 없다. 말은 곧 베풂이다. 보통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말에서도 넉넉하지 않는다. 귀를 열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한테 몸을 더 기울여서 말할지도 모른다.


말을 하기 위해서 존중감이 필요하다. 청자(聽者)를 마땅히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힘의 작용이다. 목소리의 힘 말이다. 우리는 가끔 “영혼이 없는 말이다”라고 한다. 나의 공간, 나의 내면, 나의 영혼에 들어오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래에 감동하고, 시(詩)에 감동한다. 그것은 전달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광장에 구걸하는 시각장애인이 있었다. 한겨울인데도 얇디얇은 겉옷 한 장만 걸쳤다. 그는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 동정을!’이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소리는 멀어져갈 뿐 동전 떨어지는 소리는 없었다. 그 광경을 유심히 바라보던 한 시인이 있었다. 한 때 가난했던 시인은 그에게 돈 대신 팻말에 적힌 문구를 바꾸어 주었다.


‘겨울이 왔으니 봄도 머지않았겠지요.’


사람들의 발걸음이 하나 둘 멈추기 시작했다. 깡통에도 돈이 쌓여갔다. 시인의 문구는, 지금 비록 겨울 같은 삶이지만 봄을 맞이할 수 있는 희망을 전달했기 때문이다.


법구경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성을 내지 않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이요(面上無瞋供養具), 부드러운 말 한마디는 미묘한 향이로다(口裡無嗔吐妙香).’  베트남의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 박항서 감독은 지난 스즈키컵 우승 기자회견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저를 사랑해주시는 만큼 내 조국 대한민국도 사랑해 주세요.” 


말은 이렇게 하는거다. 말은 표현하지 않으면 화중지병과 같다. 말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 속에 고마움을 담고 있으면 아무도 모른다. 말은 표현해야 한다. 그래야 고마워하는 것을 알고, 화가 나 있는 것도 알 수 있다.


김춘수의 ‘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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