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범

4. 보이지 않는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by NaeilRnC

새벽 공기가 아직 차갑게 남아 있는 출근길, 후인은 작은 습관처럼 호흡을 정리했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어둠과 밝음이 교대로 스치는 느낌이 발끝을 따라왔다. 아무것도 아닌 감각 같지만 어떤 날엔 그 작은 변화에도 마음이 크게 흔들릴 때가 있다. 이날이 그랬다. 전날 잠을 설친 탓인지 몸이 무거웠고, 머릿속은 희미하게 어지러웠다. 그 순간 어디선가 들리는 또렷한 비행음.


에에에엥—


모기였다. 겨울인데도 사라지지 않는 그것은 그의 귀 근처를 맴돌며 집중력을 가볍게 흔들었다. 모기라는 존재는 작고 하찮아 보이지만 사람의 신경을 깊게 찌르는 이상한 힘이 있다. 지금 이 순간의 후인에게도 그 소리는 단순한 벌레의 비행음이 아니었다. 마치 마음속 어딘가를 긁으며 ‘오늘도 마음 단단히 잡으라’고 말하는 듯했다.

회사에 도착하자 문을 밀고 들어가는 순간 특유의 공기가 몸 전체에 스며들었다. 전날의 응축된 스트레스, 어딘가 빠듯한 일정, 회의에서 맞춰야 할 논리들, 지나치게 빠른 업무 속도. 그리고 무엇보다 상사의 눈빛.

후인은 그 시선을 언제나 먼저 감지했다. 시선에는 늘 뭐라 이름 붙이지 못할 압력이 실려 있었다. 출근 인사조차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예의지만 후인에게는 하루의 분위기를 가늠하게 하는 잣대였다.


“왔나?”


상사의 짧은 인사. 그 말에는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평소처럼 금속성의 건조한 톤이었다. 하지만 후인은 그 톤 안에서 오늘도 긴장하라는 암묵적 메시지를 느꼈다. 업무를 시작하려던 찰나 상사는 한 가지 일을 후인에게 맡겼다.


“어제 시킨 보고서 있지? 그거 새로 정리해 와.”


어제 밤늦게까지 정리한 보고서였다. 고친 부분도 많았고 팀 내에서 확인받은 내용도 있었다. 후인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제 버전에서 어떤 부분을 더 손봐야 할까요?”


상사는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전체적으로. 다시 다.”


말은 짧았고 잔여 설명은 없었다. 상대가 힘이 있을 때, 말이 짧아진다는 사실을 후인은 여러 번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말이 짧을수록 상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후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 어떤 감정이 천천히 떠올랐다. 서운함, 억울함, 그리고 부정할 수 없는 불안. 그 감정들은 머리 위에서 낮게 웅웅 울리는 모기처럼 끊임없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날은 유난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전날의 장면, 집안의 오래된 그늘, 출근길의 모기 소리, 상사의 무심한 태도가 끊임없이 뒤섞여 올라왔다. 그는 회의실 앞에서 잠시 멈춰 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예민해진 걸까?”


예민함은 결코 약점만은 아니다. 내부에서 경보를 울리는 기능 같은 것이다. 후인은 아직 그 기능을 정확히 다루는 방법을 몰랐으나 그 경보가 울릴 때마다 자신 안의 오래된 기억들이 서랍처럼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작업을 시작하려는 순간 귓가에 다시 스치는 소리.


에에에엥—


그 소리가 이번에는 모기의 소리인지 아니면 상사의 말투가 남긴 잔향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였다.

보고서를 다시 쓰기 시작하자 후인의 손가락은 빨라졌지만 마음은 서늘하게 식어갔다. 상사는 종종 ‘내가 맡겼으니 네 시간은 나의 것’이라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그 사실을 직접 말하진 않지만 행동에서 드러났다. 급하게 호출하면 즉시 달려와야 하고, 잠시 자리 비우면 “어디 갔나?” 하는 말이 날아오고, 자료 제출 시간이 조금만 늦어져도 “기한이란 걸 좀 지켜라”라는 말이 따라왔다. 후인은 어느 순간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이 감시받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이 감각은 그가 어린 시절 느꼈던 집 안의 그늘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누군가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다.’


그 감정은 불편함을 넘어 존재 자체를 줄이는 듯한 기분을 준다. 오후가 깊어갈 무렵, 후인은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지친 눈빛, 그래도 버티려고 애쓰는 표정, 입술 옆에 작게 자리 잡은 긴장. 그리고 그 순간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모기가 사람을 건드리는 것은 피가 필요해서라기보다 사람이‘가만히 서 있는 순간’을 노리는 것이라는 걸. 가만히 있는 순간. 움직임이 멈춘 틈. 방심한 틈. 그때 모기는 가장 깊게 파고든다. 상사의 말투, 업무의 방식, 설명되지 않는 지시. 그 모든 것들이 후인의 틈을 파고들고 있었다. 작은 침범이 어떤 날은 크게 다가온다. 경계가 무너지는 느낌으로. 후인은 자신에게 물었다.


“… 나는 지금 어디까지 허용한 걸까?”


퇴근 시간이 되자 후인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몸은 하루 내내 피곤했지만 정신은 오히려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지하철에 몸을 실었을 때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어쩐지 아침보다 더 단단해 보였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작은 상처를 주었지만 이상하게도 상처는 때때로 성장의 첫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집으로 향하는 길 모기의 소리가 어렴풋이 다시 떠올랐다. 겨울의 모기는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유지하려는 생명력의 상징이다. 후인은 그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나도… 오늘은 조금 더 버텼구나.’


침범당한 하루였지만 그는 그 침범을 통해 자신의 경계를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무실의 공기는 매일 조금씩 후인을 갉아먹고 있었다. 상사의 지시가 쌓일수록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갔고,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느 날은 모기 한 마리가 귀를 스칠 때조차 이유 없는 피로가 목덜미까지 차올랐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오후, 상사는 별것 아닌 실수를 크게 부풀려 후인을 회의실에서 질책했다. 그 말투는 설명이 아니라 판결 같았다. 후인은 자신이 계속 이 자리에 있다면 어느 순간 스스로를 잃어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퇴근길, 그는 문득 깨달았다.


“여기는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곳이 아니구나.”


며칠을 고민한 끝에 그는 조용히 사표를 냈다.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그조차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만큼은 크지 않았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당장 새로운 일을 구해야 했고, 그에게 남아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이력서를 넣은 곳에서는 답이 오지 않았고, 생활비는 빠르게 줄어갔다. 그러다 지인이 말했다.


“공장 단기 인력 구하던데… 한 달만 해볼래?”


후인은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은 지쳐 있었지만 손은 아직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공장 기숙사로 향했다. 낯선 침대, 낡은 형광등, 금속 냄새가 배어 있는 작업장. 그곳은 정서적 스트레스 대신 육체적 피로를 요구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후인은 그 피로가 오히려 더 견딜 만하다고 느꼈다. 말보다 손이 더 많은 일을 처리하는 곳, 책임 대신 체력이 필요한 곳, 마음보다 몸을 먼저 쓰는 곳. 그렇게 공장의 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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