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영

3. 그늘의 계보

by NaeilRnC

후인이 초등학생 시절부터 느껴온 ‘집안의 공기’는 겨울 공기처럼 차갑고, 때로는 두껍게 내려앉는 그림자 같았다. 집 안 어딘가에는 항상 말하지 못하는 일들,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 누구도 끝까지 설명하지 않는 사건들이 얇은 먼지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공기 속에서 후인은 자라났다.


증조할머니는 가끔 후인의 아버지에 대해 뜻밖의 따뜻한 말을 꺼내곤 했다.


“니 애비는 참 어질고 속이 깊은 아이였지. 내가 낳았어도 저렇게 컸을까 싶을 만큼 말이다.”


그 말은 언제나 이상하게 들렸다. 후인이 알고 있는 아버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보다 침묵이 앞서며, 때로는 집 안의 공기를 무겁게 만들던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질고 속 깊었다고?’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었던 적이 있었나…?’


증조할머니의 말은 후인에게 오래된 퍼즐 조각 같았다. 맞춰보고 싶지만, 어딘가 하나씩 맞지 않는. 그래서 어느 날, 그는 조심스레 질문을 꺼냈다.


“근데… 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그렇게 싫어하세요?”


질문이 아직 공기에 머물러 있을 때, 증조할머니는 문득 말을 멈췄다. 부엌의 작은 창문으로 겨울 햇빛이 스며들었고, 그 빛 속에서 그녀의 표정은 그늘과 빛 사이 어딘가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건… 네가 조금 더 크면 알게 될 거다.”


그 말은 설명이 아니라 어떤 감정의 덩어리를 감춰둔 듯한 느낌이었다. 후인은 그날 그 대답이 어른들의 세계에 있는 ‘닫힌 문’ 같은 것임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 ‘닫힌 문’은, 몇 해 후 작은집에서 열린 제사 자리에서 조용히 열리기 시작했다.


제사 음식 냄새와 차가운 바닥의 촉감, 종이문을 스치는 겨울바람 소리까지 그날의 기억은 이상하리만큼 선명하다. 식구들이 삼삼오오 모이고 준비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며 할아버지가 낮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네가 올 자리 아니다.”


그 말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았다. 바로 아버지.

잠깐 침묵이 흘렀다. 작은아버지가 급히 다가와 상황을 달래려 했지만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더 단단해졌다.


“저 사람은… 이 집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


그 순간, 후인은 어린 시절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오랜 시간 눌러온 감정이 얇은 수면 아래서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그러다 증조할머니의 한숨이 방 안을 가르며 흘렀다.


“오늘은 제삿날이야. 가라앉혀야지… 그러다 제사상까지 흔들리겠네.”


할아버지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그리고 그 표정 뒤에 스친 감정은 분노보다 더 복잡해 보였다.


상처, 질투, 미움, 후회, 그리고 어쩌면… 사랑의 왜곡.


후인은 그 눈빛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후인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억울함이 치밀었고,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아버지를 향해 던지는 비난의 말들이 그저 습관인지, 진심인지, 아니면 오해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할아버지의 방문을 밀고 들어갔다.


“할아버지… 왜 그렇게 아버지를 미워하세요? 저도 알아야 할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잠시 후인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쉬운 감정이 아니었다. 어린아이에게 쏟아내기엔 무겁고 오랜 시간 쌓인 이야기들이 그의 얼굴에 얹혀 있었다.


“너도… 언제까지 모르고 살 순 없겠지.”


그 말과 함께 할아버지는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젊은 시절, 할아버지는 공부도 잘했고, 유학까지 다녀온 기대주였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즉 후인의 증조할아버지는 공직에 서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사람은 내가 세상으로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 말 안에는 감정과 욕망과 상처와 체념이 엉킨 채 들어 있었다. 결국 그는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다. 하려던 일도 하지 못했다. 다른 삶이 열리려 할 때마다 문은 닫혔다. 그러던 중 태어난 아이가 바로 후인의 아버지이었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증조할아버지는 그 아이에게만 이상하리만큼 깊은 애정을 쏟았다. 할아버지의 입술이 굳어졌다.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을 내가 원하지도 않았던 그 아이가 모두 가져갔어.”


후인은 온몸이 서늘해졌다. 그 말은 오래된 균열의 실마리처럼 들렸다. 아버지가 자라며 할아버지를 닮아갔다는 말도 그 자리에서 처음 들었다. 단단한 고집, 어른스러운 말투,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태도. 그런 모습이 깊어질수록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더 멀리했다. 그리고 영문을 모르는 아버지는 그 거리만큼 더 날카로워지거나 더 말이 없어진 날도 있었을 것이다. 후인은 문득 깨달았다. 그가 알고 있던 아버지의 침묵은 단순한 성격이 아니라 어쩌면 오래된 상처의 구조물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날 작은집에서 돌아오는 길, 후인은 온 집안의 감정이 세대를 넘어 전달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버지와 자신,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시대. 모든 것이 그늘을 만들고, 그 그늘은 어떤 방식으로든 다음 세대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날 밤, 후인은 잠들기 전에 아버지의 얼굴을 오래 떠올렸다. 아버지의 무표정한 옆얼굴, 말없이 고개를 숙이던 순간들, 삼겹살을 먹던 그 손의 움직임, 어딘가 고단했던 눈빛. 그 모든 장면이 이상하게도 낯설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 질문은 후인이 성인이 된 뒤,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다시 떠오르게 된다. 그늘 아래에서 자란 사람은 스스로도 모르게 그늘을 닮아간다. 그러나 때때로 그늘을 응시하는 사람만이 그 안에서 빛의 방향을 찾는다. 후인은 아주 어린 나이에 그 사실을 모른 채 이미 그 길에 발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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