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는 유죄다.
오늘은 무제(無題)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TV 리모컨을 돌리고, 농장게임을 했다.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학교를 다닐 때는 방학계획서를 제출해야 했다.
지키지도 못할 시간표를 그리면서 왜 이런 걸 시키는지 의아했었다.
아침 6시 기상.
아침 7시 아침식사.
아침 8시 공부.
…
저녁 9시 취침.
그렇게 나는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최적화와 지표작성법을 배웠다.
시간을 정해놓고, 항목을 나누고, 그 시간에 따라 뭔가를 해야만 성실한 사람이라는 사회적 약속.
시간표를 작성하지 않으면 폭력을 휘두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만큼 난 그때부터 '반골'이었다.
공부는 하고 싶을 때 해야 집중이 잘된다. 밥은 배고플 때 먹어야 맛이 있다. 숙제는 깜빡할 수도 있다.
삶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라고, 나는 꽤 일찍 믿어버렸다. 그러다 아버지에게 죽을 뻔했던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방학숙제를 하지 않고 친척집에서 놀기만 했다는 이유로 2층에서 1층으로 던져질 뻔했다.
그때는 가장의 권위가 누구보다 강력했고, 경찰도 이웃도 가장의 결정을 제지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시절을 ‘낭만의 시대’라고 부른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약육강식이, 어찌 보면 지극히 낭만적이기 때문이다.
낭만(浪漫)의 사전적 의미는 ‘감정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적 상태’이다.
그때는 가장의 감정, 국가적 이상주의가 현상을 좌우했다. 그래서 낭만적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한때 주말에 시간대별로 뭔가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어렸을 때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면 KBS2에서 만화를 봤고, 만화가 끝나면 ‘장학퀴즈’를 봤다.
그리고 광고처럼 짜파게티를 먹었다. 그게 내가 만든 주말의 시간표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나를 시켰다. 만화가 끝나면 퀴즈, 퀴즈가 끝나면 라면.
순서가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순서가 있으면 “놀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할 것들을 다 한 것”이 된다.
그러니까 나는 놀면서도 죄를 덜 짓는 방법을, 스스로 개발하고 있었던 셈이다.
장학퀴즈를 보는 건 솔직히 공부라기보단 면죄부에 가까웠다.
내가 실제로 똑똑해지고 싶어서라기보다, “나는 그래도 이런 걸 본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그 시절엔 증거가 있어야 살 수 있었다. 계획표도 장학퀴즈도 내가 살 수 있는 증거다.
증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은, 그 시대에는 유죄였다.
그래서 나는 일요일 ‘놀아도 되는 시간’으로 만들기 위해 오히려 더 치밀하게 놀았다.
리모컨을 돌려도 채널은 대충 고르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프로그램을 봤다.
내가 즐기는 것마저 규칙으로 감싸야 마음이 덜 불안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였다. 나는 시간표를 싫어한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시간표를 내 몸에 새기며 살았다.
시간표가 나를 때리지 않게 하려고, 내가 먼저 시간표를 들고 서 있었다. 그래서 오늘의 무제가 더 거슬린다.
오늘은 순서도 없고, 증거도 없고, 면죄부도 없다. 그냥 빈둥거렸다는 사실만 남는다.
하루가 통째로 공백인데 이상하게 그 공백이 쉬움이 아니라 죄책감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오늘은 제목도 못 붙이겠다. 무제다. 그리고 묘하게, 무제는 유죄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