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불안이 줄자, 욕망이 올라가는 인간
호모 엘레반스는 elevate (높이다)에서 따온 말로, 생존의 불안이 줄어드는 순간 마음의 기준선이 올라가, 더 높은 자극과 더 큰 의미를 찾아 삶을 ‘상향 조정’하려는 인간을 뜻한다.
Homo elevans /ˈhoʊmoʊ ɪˈlɛvənz/ 는 그 인간형의 이름이다.
평화는 좋은 것이다. 전쟁이 없고, 당장 굶지 않고, 내일이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상태. 그런 상태에서 사람은 안심한다. 문제는 안심이 계속되면 마음이 비는 순간이 온다는 데 있다. 위협이 사라지면 긴장은 풀린다. 긴장이 풀리면 ‘버티기’에 쓰던 에너지가 남는다. 남는 에너지는 자유가 되기도 하지만, 종종 공백이 된다.
평화는 불안을 줄인다. 불안이 줄면 마음에 공간이 생긴다. 그런데 그 공간이 늘 평온으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공간은 종종 허기가 된다. “더 있어야 할 것 같은” 허기. 공백은 평온이 아니라 심심함이 되고, 그 심심함은 기준선을 올리게 된다. 그러면 어제는 괜찮았던 것이 오늘은 시시해지고, 어제의 감사는 오늘의 ‘당연’이 된다.
호모 엘레반스는 그 공백과 허기를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묻는다.
“이게 내 삶의 전부일까?”
“이 정도로는 뭔가 부족해.”
“더 확실한 게 없을까?”
전형적인 장면은 이렇다. 먹고사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다. 일상은 반복된다. 이제 삶은 ‘버티기’가 아니라 ‘채우기’가 된다. 그런데 채울 게 없다. 안정은 주어져도 의미는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더 높은 것을 찾는다. 자극을 찾기도 하고, 의미를 찾기도 하고, 소속을 찾기도 한다. 핵심은 같다. “높아진 기준선”을 맞출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
여기서 엘레반스의 방식은 둘로 갈라진다.
하나는 욕망을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더 좋은 것, 더 빠른 것, 더 특별한 것을 원한다. 충족은 잠깐이고 곧 다음이 온다. 그래서 삶은 ‘충분함’이 아니라 ‘다음’으로 굴러간다.
다른 하나는 의미를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공백을 견디지 못하면 사람은 의미를 만든다. 사소한 사건을 신호로 읽고, 우연을 필연으로 엮고, 일상을 해석으로 덮는다. 의미가 붙는 순간 마음은 잠깐 안정된다. 세상이 다시 통제 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을 견디는 대신, 아는 척할 수 있게 되니까.
하지만 욕망이 올라가고 의미가 과열되면 비용이 생긴다. 욕망이 높아질수록 현재는 얇아진다. 현재는 늘 부족하고, 늘 미완성이고, 늘 덜 특별해 보인다. 의미가 많아질수록 세계는 더 피곤해진다. 모든 것이 신호가 되면 아무것도 그냥 지나가지 못한다. 그는 쉬지 못한다. 쉬지 못하는 이유가 일이 아니라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불안을 완전히 없애지 못한다. 생존 불안이 줄어든 자리에 비교 불안, 의미 불안, 정체성 불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불안이 사라진 게 아니라, 불안의 형태가 바뀐 것이다.
나는 이 인간형유을 따로 불러야 했다.
평화는 인간을 편하게 만들지만, 편안함은 인간을 더 예민하게 만들기도 한다. 위협이 없을수록 우리는 더 높은 기준으로 스스로를 재단하고, 그 기준을 채우기 위해 더 큰 의미를 생산한다.
당신이 요즘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그 부족함은 결핍이었나, 아니면 평화가 만든 허기였나.
당신이 요즘 붙이고 있는 의미는 당신을 살리고 있나, 아니면 공백을 견디지 못해 만들어낸 과잉 생산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