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첩

24. 사진은 생활의 흔적이었다.

by NaeilRnC

도윤이 “결혼식 사진”이라고 말한 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이 사라진 자리에는 집의 소리만 남았다. 냉장고가 낮게 울고, 창밖에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멀게 들렸다.


나는 그 소리들이 이상하게 고마웠다. 소리는 기록보다 덜 잔인하다. 소리는 그냥 있다. 그리고 그냥 있는 것들은 때로 가장 오래 남는다. 도윤이 물었다. 바로 볼 거냐고. 나는 “바로”라는 단어가 부담이었다.


나는 지금도 내 삶의 속도를 조절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그래서 도윤이 내게 늘 주던 방식으로 대답했다. 결론이 아니라 증거부터. 그리고 작은 것부터.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거실 서랍으로 가서 얇은 사진첩 하나를 꺼냈다.


표지는 회색이었다. 글자도 없었다. 도윤은 내가 글자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더 아팠다. 내가 몰랐던 결혼보다, 내가 잊어버린 ‘일상’을 누군가가 기억하고 있었다는 게 더 현실적이어서.

도윤이 사진첩을 내 앞에 놓았다. 그리고 규칙을 하나 더 말했다. 멈추고 싶으면, 바로 멈춘다고. 설명은 필요 없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진첩을 열었다.


첫 장은 대학 사진이었다. 동아리방, 술자리, 단체사진. 얼굴들이 많았고, 내 얼굴도 있었다. 나는 그 사진 속의 내가 낯설었다. 그런데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내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딱 그 정도의 온도로 내 앞에 놓였다.


두 번째 장을 넘기자, 사진의 밀도가 달라졌다. 사람들이 줄고, 배경이 가까워졌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진들. 그 중심에 도윤이 있었다. 내 옆에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당연하다는 건, 가장 무서운 증거다. 누군가가 내 삶에 ‘상시’로 있었는데, 나는 그 상시를 잃어버렸다는 뜻이니까.


나는 사진 한 장을 가리켰다. 카페. 창가 자리. 두 잔의 음료.

도윤은 장소를 설명해줬다. 졸업하고 몇 년 뒤, 자주 가던 카페라고. 나는 기억이 없다고 말했지만 도윤은 괜찮다고 했다. 냄새는 나중에 기억날 수도 있다고. 나는 사진을 더 넘겼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는 것이 사진첩 안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 자연스러움이 무서웠다. 우리가 ‘사건’으로 이어진 게 아니라, 그냥 살아서 이어졌다는 게. 사건은 잊혀도 생활은 남는다. 생활은 폭발하지 않지만, 끝까지 남는다. 세 번째 장에서 손이 멈췄다.


사진 속에서 나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도윤은 흰색 옷을 입고 있었다. 완전한 웨딩드레스는 아니었다. 과하지 않은, 단정한 흰색. 배경도 화려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했다. 조용한 실내, 작은 꽃, 가까운 사람들만 있는 듯한 공기. “기념”이라기보다 “선언”에 가까운 사진이었다.

“이게… 결혼식이야?”


도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도윤은 내 속도를 지키는 사람이니까. 대신 사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내 손. 내 손이 도윤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잡는 방식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엄지로 도윤의 손등을 살짝 누르는 습관. 내가 지금 도윤 손을 잡을 때의 방식과 같았다. 나는 사진 속 내 손을 보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 이건 내 손이다.


나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사진 아래쪽 인화지 모서리에 찍힌 날짜를 봤다. 날짜를 읽는 순간, 머리가 멈췄다. 그 날짜는 내가 병원에 가기 시작하기 전과 후의 경계에 걸려 있었다. 내 기억이 흐려지기 시작한 시기.

내가 내가 아닌 느낌이 들기 시작한 시기. 나는 물었다. 그때 내 상태가 어땠냐고.


도윤은 “좋지 않았어”라고 말했고, 한 박자 뒤에 덧붙였다. 하지만 그때 “지금 이 순간이 나중에 사라질 거면, 더더욱 남기고 싶다”고 내가 말했었다고. 그 문장이 내 심장을 찔렀다. 프롤로그의 문장과 같은 결이었다.


‘추억은 증거’라는 믿음. 내 말이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말투가 아니라 절박함이 나 같아서.

사진첩을 더 넘기려는데, 내 손이 떨렸다. 도윤이 조용히 물었다. 멈출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나만 더.


다음 사진은 더 가까웠다. 우리 둘만 찍힌 사진. 배경은 흐릿했고, 얼굴이 선명했다. 도윤의 눈이 약간 젖어 있었다. 나는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내가 평소에 하는 억지 웃음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기대도 괜찮다고 믿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이때 나는… 뭐였냐고.


도윤이 아주 조용히 말했다. 무서웠다고. 나는 물었다. 그런데 왜 웃고 있냐고.

도윤은 잠깐 숨을 고르고, 답을 고르는 사람처럼 말했다. 너는 무서울수록 확실한 걸 만들려고 했다고. 우리가 확실하면, 너도 버틸 수 있다고 믿었다고.


‘우리’가 확실하면, ‘나’도 버틴다.

그 문장은 사랑이라기보다 생존의 문장 같았다. 그래서 더 아팠다. 사랑의 말이면 낭만으로 넘어갈 수 있는데, 생존의 말은 낭만이 아니라 구조가 되니까. 구조는 쉽게 지워지고, 쉽게 이용된다. 어머니가 하던 ‘정리’가 떠올랐다. 정리라는 말이 내 삶을 얼마나 많이 잘라냈는지.


그때 현관 쪽에서 아주 미세한 소리가 났다. 도어락이 아니라 복도 발소리. 누군가가 지나가는 소리. 그런데 나는 몸이 경직됐다. 어머니가 돌아올까 봐가 아니라, ‘정리’가 다시 시작될까 봐. 도윤이 내 표정을 보고 낮게 말했다. 어머니는 갔다고. 그리고 이제 네가 정리할 차례라고. 네 방식으로.


나는 정리하는 말이 싫다고 말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맞추기.”를 하자고 말했다.

나는 사진첩을 천천히 닫았다. 닫는 손끝이 떨렸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확신이 생겼다. 나는 오늘 결혼을 확인한 게 아니다. 나는 오늘 “내가 도윤을 잡는 방식”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방식이 ‘처음’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나는 도윤을 불렀다. 그리고 물었다. 우리가 왜 이렇게까지 했냐고. 너 때문이냐고. 나 때문이냐고.

도윤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은 회피가 아니라 정직이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둘 다.”


너는 잊어버릴까 봐 무서웠고, 나는 네가 잊어버릴 걸 알아서 더 무서웠다고. 그래서 우리는 기억하기 위해 추억을 만들었다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어도 다시 찾기 위해서였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안에서 문장이 하나 완성됐다. 프롤로그의 제목이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우리의 방식이었다는 것. 나는 거의 속삭였다. 다시 찾을 수 있냐고. 내가, 우리를.


도윤은 대답 대신 사진첩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사진 한 장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사진첩에 끼워두지 않은, 따로 보관하던 사진이었다. ‘생활’이 아니라 ‘기점’에 가까운 사진. 사진에는 병원 복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 복도에서 내가 도윤을 보고 있었다. 내 표정은 내가 프롤로그에서 말했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표정. 사진 아래에는 날짜가 있었다. 그 날짜는 내가 도윤을 “그냥 동기”라고 믿고 있던 시기였다.


도윤이 말했다. 이 사진이, 네가 우리를 잊기 시작한 날이라고. 나는 사진을 바라보다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그날부터… 네가 설명서를 만들었구나.”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응. 근데 설명서의 첫 줄은… 너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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