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서의 첫 줄

25. 너를 잊지 않게 하는 문장은 늘 너에게서 시작된다.

by NaeilRnC

도윤이 꺼낸 병원 복도 사진은 이상하게 결혼식 사진보다 더 무거웠다. 결혼식은 ‘결론’에 가까웠고, 병원 복도는 ‘시작’에 가까웠다. 결론은 언젠가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시작은, 그때부터 내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사진을 내려놓고 말했다.

“설명서… 진짜 있었어?”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덧붙였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관리’가 아니라고. 도윤은 잠깐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에 가까웠다.

“너를… 너한테 돌려주는 문장들.”


도윤이 거실 서랍을 열었다. 아까까지 나는 그 서랍을 의식하지 못했다. 의식하지 못했다는 건, 내 몸이 이미 이 집의 동선을 알고 있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도윤은 서랍 깊숙한 곳에서 작은 노트를 꺼냈다.


낡은 초록색 표지. 유난히 얇은 페이지. 나는 그 노트를 보는 순간 목이 뜨거워졌다. ‘상상’이라고 생각했던 물건이 손이 닿는 현실로 나타났다. 상상이 아니라 기억의 잔해였다는 뜻이다. 도윤이 노트를 내 앞에 놓았다.

“열어도 돼. 근데 오늘도 규칙. 네가 싫으면 덮어. 그러면 나는 멈출거야”


나는 대답 대신 노트를 열었다.

첫 페이지. 날짜. 그리고 한 문장. 글씨는 도윤의 글씨인데, 문장 자체는 나 같았다. 말투가 아니라 마음의 모양이. ‘오늘은 후인이가 자기 이름을 한 번 더 확인한 날.’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내 이름을… 확인했다고?”


도윤이 조용히 말했다. 그날 나는 보호자 동의서에 사인하려고 했다고. 아직 결혼 얘기 이전이었고, 나는 그걸 몰랐다고. 도윤은 “몰랐다”는 말을 ‘무지’가 아니라 ‘상태’로 처리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속도를 낮췄다.


나는 손끝으로 문장을 문질렀다. 종이가 얇아서, 잉크의 굴곡이 손끝에 닿는 듯했다. 내가 존재했다는 방식이 이렇게 얇고 단단할 수 있다는 게 이상했다. 나는 페이지를 넘겼다. 각 페이지는 ‘추억’이라기보다 ‘지침’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지침은 차갑지 않았다. 관리가 아니라 환기였다. 나를 나에게 되돌리는 방식.


‘후인이가 불안해질 때는 물부터 마신다.’
‘후인이가 화를 낼 때는 사실 무서운 거다. 그러니까 “괜찮아?”보다 “여기 있어”를 먼저 말한다.’
‘후인이가 “모르겠어”라고 말하면 결론을 주지 말고, 증거를 하나만 보여준다.’


나는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상단에 굵게 적힌 제목.

‘후인이가 잊어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

그 아래는 항목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항목들은 내 삶을 ‘설명’하지 않았다. 내 삶을 ‘증명’했다.

아이스크림은 늘 안전한 맛을 고른다. 그러나 새로운 맛을 한 입 먹으면 웃는다.

비 오는 날엔 우산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별 스티커가 필요하다.

바다를 보면 “회색인데 우울하지 않다”라고 말한다.

펜 굳은살을 보고 “살아 있는 증거 같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머니 앞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문장: 내 편.


나는 마지막 항목에서 숨이 멎었다. ‘내 편’이라는 말은 오늘 내가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트에는 그 말이 이미 오래전에 적혀 있었다. 오늘은 새로운 말이 아니라, 잊었던 말을 되찾은 날이었다. “나 원래… 이런 말 했어?”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는 원래 네 편을 들 줄 아는 사람이었어. 어머니 앞에서는 잊어버렸을 뿐.”

‘어머니’라는 단어가 나오자 노트가 갑자기 더 현실적이 됐다. 이 노트는 사랑의 기록이 아니라 전쟁의 기록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한, 그리고 누군가에게 ‘정리’되지 않기 위한 얇은 방패.


나는 다음 장을 넘겼다. 그리고 그 페이지에서 완전히 멈췄다. 상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설명서의 첫 줄’ 그 아래, 딱 한 문장. ‘후인은 도윤을 몰라도, 도윤은 후인을 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가슴이 내려앉았다. 너무 단정해서 잔인했다. 내가 도윤을 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만들어진 문장. 그 전제가 너무 현실이라 숨이 막혔다. 나는 도윤을 불렀다.

“도윤아. 너는… 이게 괜찮았어?”
그리고 더 솔직한 질문이 이어졌다.
“내가 너를 모르면… 너는 어떻게 버텼어?”


도윤은 한참 말이 없었다. 노트가 얇은 이유가, 아마 이 침묵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종이는 얇아도 되는데, 침묵은 두꺼우면 견디기 어렵다. 도윤이 아주 천천히 말했다.

“버틴 게 아니라… 그냥 했어. 해야 했으니까. 너를 다시 네 손에 쥐여주는 일.”


도윤은 웃었지만 눈이 젖어 있었다.

“너는 잊어도, 너의 방식은 남잖아. 안전한 맛 고르는 거, 물 먼저 마시는 거, 손을 잡는 방식… 그런 것들은 남아. 나는 그 남은 것들만 붙잡고 있었어.”


나는 노트를 덮었다가 다시 열었다. 다음 페이지에는 날짜와 함께 짧은 문장이 있었다.

‘오늘, 어머니가 나를 따로 불렀다. 나에게 “네가 떠나야 후인이가 산다”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 날… 언제야.”

도윤은 눈을 내리깔았다. “네가 기억을 확실히 놓치기 시작한 뒤였어.”

그리고 덧붙였다. “너는 그때 나한테 이렇게 말했어. ‘어머니랑 싸우지 말자. 내가 버틸게.’”


그 문장이 너무 낯익어서 소름이 돋았다. 갈등을 피하고, 내가 버티겠다고 말하는 방식. 그런데 오늘의 나는 그 문장과 반대편에 서 있었다. 오늘은 내가 버티는 방식이 달라졌다. 피하지 않는 방식.

도윤이 노트를 한 장 더 넘겼다. 그 페이지에는 더 딱딱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어머니가 준비한 문서: 동의서, 지정서류, 연락처 목록.’

나는 숨을 삼켰다.

“그게… 뭐야?”


도윤은 대답 대신 휴대폰을 열었다. 사진이었다. 어느 날 찍어둔 문서 사진. 상단에 병원 이름, 그리고 ‘보호자’라는 단어. 무엇보다 내 눈을 멈추게 한 문구가 있었다. ‘응급 시 이송 및 조치 동의’

나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머니가… 이걸 준비해놨어?”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만이 아니야. 한 번이 아니야. 어머니는 네가 흔들릴 때마다 ‘정리’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놨어.”

손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내가 어제 어머니에게 ‘내 편’이라고 말한 건 말싸움이 아니라 현실과의 싸움이었다. 어머니는 언제든 시스템을 불러 나를 데려갈 수 있다. 그게 ‘보호’라는 이름으로 가능하다는 게 더 무서웠다.

나는 물었다.

“그럼… 우리는 이제 뭘 해야 해?”


도윤이 노트를 내 앞에 다시 밀었다. 그리고 ‘설명서의 첫 줄’ 아래에 새 문장을 적기 시작했다.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 그 소리는 이상하게 나를 안정시켰다. 서명하던 날의 감각처럼. 도윤이 적은 문장은 짧았다.

‘후인은 도윤을 몰라도, 후인은 후인의 편을 든다.’

도윤이 펜을 내려놓고 말했다.

“이제 첫 줄을 바꿔야 해.”
“너를 내가 아는 걸로 버티는 게 아니라, 네가 너를 아는 걸로 버티게.”

나는 노트 위의 문장을 바라보다가 속삭였다.

“도윤아… 나 오늘 밤에 또 잊으면 어떡해.”

도윤은 바로 대답했다.

“그러면 또 만들자.”
“기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찾기 위해서.”


그때였다. 도윤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엔 어머니가 아니었다. 낯선 번호였다. 도윤이 화면을 보자 얼굴이 굳었다.

“누구야?”

도윤이 숨을 한 번 삼키듯 넘기고 말했다.

“병원이야.”
그리고 낮게 덧붙였다.
“어머님이… 뭔가를 시작했어.”


거실 공기가 다시 차가워졌다. 노트는 얇았지만, 그 안의 문장들은 이제 추억이 아니라 방패였다.

나는 노트를 가슴 쪽으로 끌어안았다. 오늘의 증거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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