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장소에서 시끄러운 사람들
지하철이다. 조용한 객차 안에서 사람들이 각자의 휴대폰을 보고 있다. 누군가는 음악을 듣고, 누군가는 뉴스를 보고,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본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전화를 받는다.
“어, 나 지금 지하철이야.”
그 순간 객차의 공기가 조금 달라진다. 몇몇 사람의 시선이 그 사람에게 향한다. 목소리가 조금만 커져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조용히 좀 하지.”
흥미로운 점은 여기 있다. 지하철 안에는 이미 수많은 소리가 있다.
철로 마찰음, 안내 방송, 사람들의 움직임, 가방 지퍼 소리 등등. 그런데도 사람들은 전화 통화 소리에 특히 예민하게 반응한다. 왜 그럴까. 통화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대화의 한쪽만 들리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엠버슨(Lauren L. Emberson)·루피언(Gary Lupyan)·골드스타인(Michael H. Goldstein)·스파이비(Michael J. Spivey, 2010)는「Overheard Cell-Phone Conversations: When Less Speech Is More Distracting」(엿듣게 되는 휴대전화 통화: 덜 들릴수록 더 산만해진다)에서 사람들이 대화의 절반만 들을 때 더 큰 주의 분산을 경험한다고 설명했다.
“대화의 양쪽을 모두 듣는 것보다, 한쪽만 듣는 상황이 더 큰 산만함을 유발한다.”
이 연구가 말하는 핵심은 단순하다. 사람의 뇌는 대화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전체 맥락을 복원하려고 한다.
그런데 전화 통화는 절반만 들린다. 우리는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어디라고?” 같은 말만 듣고, 나머지 절반은 상상으로 메워야 한다. 그래서 전화 통화는 단순한 소리 이상의 것이 된다.
덜 들리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경 쓰이는 소리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공공장소에서 통화 소리가 유독 무례하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가 단순히 산만해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소리가 공공장소의 규칙을 어겼다고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엘리아스(Norbert Elias, 1939)는『The Civilizing Process』(문명화 과정)에서 근대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신체 기능과 감정 표현을 점점 더 절제하고 통제하는 방향으로 사회화된다고 보았다. 엘리아스에 대한 해설 연구들은 그가 문명화 과정을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를 더 강하게 통제하고, 몸의 소리와 감정 표현을 더 엄격히 억제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공공장소에서 조용히 있는 것은 단순한 예절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화된 자기 통제의 결과다. 사람들은 이렇게 배운다.
공공장소에서는 크게 떠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는다.
공간의 분위기를 존중한다.
그래서 누군가 지하철 안에서 큰 목소리로 통화를 하면 사람들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전화 통화 소리는 단순한 음성이 아니라, 배려 없음의 신호로 번역된다. 그래서 공공장소 통화 소음이 유독 거슬리는 이유는 두 겹이다.
하나는 뇌가 대화의 나머지 절반을 계속 추론하려 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 소리가 우리가 공공장소에서 기대하는 절제와 배려의 규범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공공장소에서 통화하는 사람에게 단순히 “시끄럽다”고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왜 저 사람은 다른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공공장소의 통화 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예절이 되고, 배려가 되고, 사회적 규칙의 시험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소리 때문에 불편한 것일까. 아니면 그 소리를 통해 타인의 태도를 상상하고 있기 때문에 불편한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단순히 전화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공공장소의 규칙을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지를 듣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