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느낌70

스페어가 사라졌다

by NaeilRnC

와. 보통 주말이면 브런치 업로드용 스페어를 충분히 쌓아두는 게 나의 루틴이었는데,

이번 주는 정말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니 스페어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루틴이 무너졌다는 건 단순히 글을 못 썼다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내 시간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독자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내 일이 아니라 ‘그놈’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내 일은 밀렸고, 내 리듬은 무너졌고, 결국 예상했던 대로 모든 일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계속되는 압박과, 징그럽게 나가지 않는 진도. 이제는 물어볼 사람도 없다. 그 ‘그놈’조차 나에게 일을 던지지 못할 만큼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간다.


웃긴 건,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거창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스페이스 두 번. 점 하나. 날짜 표기 한 칸. 그 사소한 것들 때문에 욕을 먹는다. 틀린 건 아니다. 틀리면 안 되는 것도 맞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런 디테일은 일을 잘하게 만들기보다는 사람을 위축시키는 쪽으로 더 많이 작동한다. 조금씩 자신감이 깎인다. 이게 맞나 싶다가도, 그걸 다시 물어볼 여유조차 없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버티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다만 하나는 확실하다. 스페어가 사라졌다는 건 단순히 글이 밀린 게 아니라 나의 여유가 먼저 사라졌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 새로운 빌런이 등장했다. 그녀는 국장, 팀장 다음으로 근속이 오래된 ‘역시 고인물’이었다.


그녀의 업무는 경리. 이제 그녀를 Y라고 한다. 이 조직에서 경리의 업무는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그녀와 척을 지는 순간 지옥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녀가 나를 찍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말했다.


“내가 원래 말이 좀 직설적이에요.”


이 뜻은 “내가 이 구역의 미친년이다”라는 말과 같다. 오래전 회사에서 만났던 한 여직원도 나에게 첫인사로 비슷한 말을 했다.


“제가 원래 좀 직설적이에요. 그냥 그러려니 하시면 마음 편하실 거예요.”


그 후 그녀는 자신의 생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장에게도 서슴없이 들이받았고, 결국 잘렸다. 그래서 Y의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때 그 여직원이 바로 떠올랐다.


다시 돌아와서, Y는 정말 말을 싸가지 없이 내뱉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게 자신의 강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초 회사에서 국장 다음으로 나이가 많고, 근속이 오래된 그녀는 군기반장을 자처하며 모든 여직원들의 위에 군림했지만, 사실은 여직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세작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언젠가부터 나를 찍었다는 건 나에게는 꽤 쎄한 조건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녀에게 친절하려고 했다. 그래서 오늘도 비타민3000과 바카스를 갖다줬다. 그런데 돌아온 말은 이거였다.


"위염 걸린 사람한테 비타민을 주는 건 먹고 죽으라는 거냐고."


순간 멍해졌다. 호의가 돌아와 무안이 되는 순간은 늘 비슷하다. 사람을 화나게 하기보다, 먼저 지치게 만든다. 돌아보면 오늘은 그런 식이었다. 내 일은 밀렸고, 내 루틴은 무너졌고, 내 자신감은 스페이스 하나에 깎였고, 내 호의는 무안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스페어가 사라진 건 글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유도, 호흡도, 사람 대하는 힘도 같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번 주는 정말 사람을 잘 깎아먹는 주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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