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느낌80-2

다하지 못한 얘기

by NaeilRnC

그동안 너무 한숨만 쉬어대서 오늘은 그냥 벚꽃 얘기로 때우려고 했다. 그런데 도저히 안 되겠다.


원래는 4월 1일까지 추경예산 설명서를 넘겨야 했다. 그런데 나는 이미 다 끝냈었다. 별로 수정할 것도 없었고, 기존 예산을 쪼개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그걸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신임대리가 조금 도와주었다. 그래서 제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Y가 나를 불렀다.


“대리님, 잘 모르겠으면 센스라도 있어야죠.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거 안 봐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내가 어떻게 보지. 개인별로 보내고 본인이 취합을 하는데?'

하지만, 난 오늘 너무 할게 많았기 때문에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다시 수정해서 보내드릴게요.”


잠시 후, Y가 나를 또 불렀다.


“대리님, 센스가 없으면 머리를 좀 굴려봐요.”


순간, 이성을 잃을 뻔했다. 그깟 예산서 실수 좀 했다고 센스 없다는 소리, 머리를 굴리라는 소리까지 들을 만큼 내가 큰 잘못을 한 걸까. 나는 분명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고, 모두가 있는 그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줄 만큼 대단한 분량의 실수도 아니었다. 그냥 자기가 한 칸 늘려서 복사해서 붙여넣으면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그년은 노골적으로 나를 또 깠다. 순간,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신임대리는 내 표정을 보더니 입모양으로 말했다.


‘뭔데요? 왜? 왜?’


하. 나는 원래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센스로 한 방, 머리로 한 방 더 맞으니까 정말 정신이 없었다. 아침부터 국장님이 던진 신규 업무 두 개를 처리하고 있었고, 어제 내가 본청에 검토 요청을 보냈던 계획으로 한 번 까였고, 조금 전에는 4월 17일 간담회 준비까지 받아와서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인신공격까지 받으니 순간 욕이 나올 뻔했다.

자리로 돌아와 나지막이 욕을 했더니 ‘그놈’이 다가왔다. 그리고 큰소리로 말했다.


“내가 뭐 도와줘요?”


그 순간 들었던 생각은 하나였다. 이 조직은 정말 쓰레기들만 모여 있는 것 같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팀장님께 갔다.


“면담을 신청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면담에서 팀장님은 내게 한마디만 했다.


“야, 들이받아. 욕은 하지 말고, 나머지는 내가 책임질게.”

“형, 정말 죄송한데요. 제가 저따위 경리년한테 병신 취급 당하는 게 너무 자존심 상합니다.”

“야, 나도 여기서 얼마나 무시받았는지 알아? 난 심지어 조리학과 출신이야, 임마.”

“제가 직업에 대한 선입견이 없었는데, 여기 와서 나도 모르게 쓰레기가 되는 것 같아서 더 못 다니겠어요.”

“야, 너랑 나랑 토박이 단둘이 지역 지키려고 들어왔잖아. 그리고 네가 능력이 없었으면 국장님이나 내가 너를 내보냈지. 네 발전 가능성을 보고 계속 가려고 널 선택했는데 네가 이러면 국장님께도 민폐야.”

“저도 이제 들이받습니다. 이제는 못 참겠어요.”

“내가 책임질게. 욕만 하지 마. 내가 Y 불러서 얘기할게. 너 지금 당장 사무실 들어가지 말고 어디 가서 담배 두 대 피고 들어가.”


담배를 피우고 들어가자 이번에는 국장님이 불렀다.


“대리님, 어제 나랑 얘기하지 않았어요? 이거 연합회에서 제시한 의견이 아니라서 빼기로 했는데 왜 또 넣었어? 대외적으로 나가는 문서는 조심했어야지. 이거 어떻게 할 거야?”

“……”

“여러분, 경고할게요. 대외적으로 나가는 문서는 문장 한 줄, 단어 하나 꼼꼼하게 체크하세요.”


오늘 날이구나 싶었다. 내 주변의 모든 빌런들이 나에게 총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너무 맞아서 정신없는 나에게 이번에는 신임대리가 왔다.


“대리님, 퇴사하는 거예요? 난 대리님을 믿었는데 나가기 전에 나한테 얘기해 준다면서요! 실망이에요. 앞으로 저한테 말 걸지 마세요”


이건 또 뭐지 싶었다. 그런데 더 이상 대꾸할 시간도 없었다. 외근을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는 사진을 찍어야 하고, 서명부를 받아야 하고, 저녁값을 결제해야 한다. 국장님과 연합회 사무실로 가면서 말했다.


“국장님, 아까 말씀하신 부분. 국장님이 잘못 알고 계셨습니다. 제가 정리했고, 제가 분석했고, 제가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제가 없는 내용을 왜 넣겠습니까?”

“……”


사무실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본청 주무관이 쪼아댔다.


“대리님, 대리님, 대리님……”


사람들이 모이고, 서명부를 받고, 사진을 찍고, 앉았는데 이번에는 선진지견학에 대한 보고를 하란다.

'내가? 난 거길 다녀오지도 않았는데?'


국장은 내 옆에서 눈짓으로 말한다. '빨리 해. 니 일이잖아.'

그래, 분명 회의자료를 처음에 만든 사람은 나였다. 그런데 본청에서 내용을 바꿨다. 그리고 그 바뀐 내용을 내가 설명해야 하는 타이밍까지 온 것이다.


"네, 지난 3월 16일부터 18일까지 2박3일 간 선진지 견학에 관해 보고드리겠습니다......그래서 이번 보고의 시사점은....이상입니다."


보고가 끝나자 국장이 속삭였다.

"오, 말 잘 하는데!"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어디 하나에서만 맞는 날이 아니라, 사방에서 동시에 맞는 날.

실수는 수정하면 된다. 착오는 설명하면 된다. 그런데 사람을 깎아내리는 말은 수정도 안 되고, 설명도 안 된다. 한 번 꽂히면 그대로 남는다. 그래서 더 오래 간다. 생각해 보면 내가 정말 화가 났던 건 업무 때문이 아니었다. 일은 원래 많고, 꼬일 수도 있고, 다시 하면 된다. 문제는 일을 핑계로 사람을 하대하는 태도였다.


잘 모르겠으면 알려주면 되는 일인데, 왜 굳이 센스를 들먹이고 머리를 운운하면서 사람을 깎아내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건 업무 지적이 아니라 인격을 누르는 방식이다. 그리고 더 웃긴 건 그런 날에도 일은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욕을 먹어도 외근은 나가야 하고, 열이 받아도 사진은 찍어야 하고, 자존심이 상해도 서명부는 챙겨야 하고, 기분이 박살 나도 보고를 무사히 마쳐야 하고, 배가 고파도 저녁값을 결제해야 했다.


그러니까 조직은 사람을 무너뜨릴 때조차 그 사람의 기능은 계속 사용한다. 어쩌면 그래서 더 지치는지도 모른다. 사람으로는 상처를 받는데, 실무자로는 멈출 수가 없다. 오늘 나는 여러 번 참았다.


Y 앞에서도 참았고, ‘그놈’ 앞에서도 참았고, 국장님 앞에서도 참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참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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