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느낌84-1

소리의 권력- 통제되지 않는 내면은 바깥을 점유한다

by NaeilRnC

Y는 출근을 하면 거의 의식처럼 제일 먼저 음악을 튼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사무실의 공기는 이미 음악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그 취향이 일정하지 않다. 어떤 날은 최신가요를 틀다가, 다음 날은 재즈를 틀고, 또 어떤 날은 전혀 맥락 없는 음악이 이어진다. 흐름이 없다. 기준도 없다. 그날그날의 상태가 그대로 흘러나오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그냥 취향이 독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듣다 보니 묘하게 피곤해진다. 음악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음악이 만들어내는 상태 때문이다. 이건 함께 듣는 음악이 아니라, 누군가의 상태가 그대로 공간 위에 깔리는 느낌에 가깝다. 그래서 가끔 이런 생각이 스친다. 저 사람, 멘탈이 많이 긁혀 있는 상태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장면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건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사무실이라는 공적 공간을 특정한 감각으로 채우는 방식이다. 음악을 트는 행위 자체는 사소해 보인다. 누구나 할 수 있고, 굳이 문제 삼기에도 애매하다. 그런데 그 영향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


선택은 한 사람이 했는데, 그 선택의 결과는 공간 전체에 퍼진다. 이 순간 음악은 취향이 아니라 환경이 된다. 그리고 환경이 되는 순간, 그건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걸 조금 더 냉정하게 보면, 하나의 권력 구조가 보인다. 누가 명령하지 않아도,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그 사람은 사무실의 감각을 먼저 결정한다.


어떤 리듬이 흐를지, 어떤 분위기가 깔릴지, 어떤 상태로 하루가 시작될지가 그 사람의 선택으로 정해진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선택하지 않았지만, 거부하기도 어렵다. 이어폰을 끼거나, 참고 넘기거나, 그냥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이건 눈에 보이는 권력은 아니지만, 분명히 작동하는 힘이다.


쿠르트 레빈(Kurt Lewin, 1936)이 말했듯 인간의 행동은 개인과 환경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걸 뒤집어 보면 더 분명해진다. 환경을 장악하는 사람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음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집중을 흔들고, 생각의 흐름을 끊고, 감정을 미묘하게 바꾸는 요소다. 그걸 매일 먼저 틀고 있다는 건, 그 사람이 그 공간의 기준을 먼저 설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더 드러난다. 그 기준이 일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음악은 계속 바뀌고, 분위기는 이어지지 않고, 흐름은 매번 끊긴다. 이건 취향의 다양성이라기보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가 그대로 반복되는 느낌에 가깝다. 그래서 이 장면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 상태의 문제로 보이기 시작한다.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930)는 인간이 열등감이나 불안을 느낄 때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통제력을 확보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Y의 행동은 조금 더 명확해진다.

내면이 안정되어 있을수록 사람은 굳이 외부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내면이 흔들릴수록, 사람은 외부에서라도 작은 기준을 만들고 싶어 한다. 사무실에서 음악을 트는 행위는 바로 그런 방식일 수 있다. 크지 않지만 확실한 통제, 누구도 크게 문제 삼지 않지만 모두 영향을 받는 영역이기 때문에 더 자연스럽게 작동한다.


그런데 오늘 더 묘한 사실을 알게 됐다. Y와 ‘그놈’ 둘 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다.

순간 이상하게 납득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가장 사람 좋은 이들과,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이들이 같은 종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간극이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설명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생각이 이어졌다. 도대체 종교란 무엇일까.


피터 버거(Peter Berger, 1967)는 종교를 인간이 세계의 혼란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의미의 구조라고 설명했다. 사람은 무질서를 그대로 두지 못한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설명하려 하고, 불안한 상태를 안정시키려 하고, 흩어진 경험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으려 한다. 종교는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가장 강력한 장치다.


이 관점에서 보면 Y의 모습은 하나로 이어진다. 내면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고, 그래서 외부에서 작은 질서를 만들고, 동시에 종교를 통해 의미를 확보한다. 안에서는 의미를 붙이고, 밖에서는 환경을 통제한다. 두 방향 모두 같은 기능을 한다. 불편한 상태를 그대로 두지 않기 위한 방식이다.


문제는 이 두 가지가 항상 같은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종교는 내면을 정리하는 장치지만, 그 결과가 반드시 외부에서 배려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내면의 불안을 종교로 설명하고, 외부에서는 그 불안을 통제로 보상하는 방식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누군가는 더 따뜻해지고, 누군가는 더 독단적이 된다.


다시 Y를 보면, 그 음악은 단순한 취향으로 보기 어렵다. 그건 정리되지 않은 상태가 외부로 흘러나오는 방식이고, 동시에 그 상태를 견디기 위한 작은 통제다. 사무실이라는 공적 공간 위에 개인의 감각이 깔리고, 그 감각이 아무런 저항 없이 유지되는 순간, 그건 이미 하나의 권력이 된다. 작고 사소해 보이지만, 그래서 더 쉽게 작동하고, 그래서 더 오래 지속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음악을 들으며 불편함을 느끼지만 쉽게 말하지 않는다. 사소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소함이 반복되면서 공간의 기준이 바뀌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 상태가 당연한 것처럼 굳어진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무실은 더 이상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상태가 자연스럽게 깔려 있는 공간으로 바뀌어 버린다.


결국 이 장면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정리되지 않은 내면이 어떻게 바깥으로 퍼져 나오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에 가깝다. 사람이 스스로를 완전히 정리하지 못할수록, 그 불안정한 상태는 작은 방식으로라도 외부에 흔적을 남기게 되고, 그 흔적은 생각보다 쉽게 주변 사람들의 환경이 된다. 그래서 사무실에 흐르는 음악은 단순한 배경음이라기보다, 누군가의 상태가 그대로 공유된 결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생기게 된다.


난 오늘도 그녀를 보고, 느끼고, 이해하고 싶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별로'라는 생각뿐이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싫어질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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