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은 결국 나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정체

by NaeilRnC

살다 보면 유난히 싫은 사람이 있다.

말투가 싫고, 표정이 싫고, 태도가 싫고, 그 사람이 굳이 하는 말 한마디까지도 거슬린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그 사람에게서 못 견뎠던 것들이 사실은 내 안에도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걸 인정하는 순간 기분이 묘하게 더러워진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싫어했던 이유가 결국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그렇게 까칠한 사람인 줄 잘 몰랐다.

그런데 나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를 두고 “까칠하다”고 말했다. 처음엔 억울했다.

나는 까칠한 게 아니라 예민한 거라고 생각했다. 예민한 게 아니라 기준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 상대가 둔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씩 변명하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건 별로 고상한 해석이 아니다. 그냥 성격이 안 좋은 사람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문득 상상해 본다. 만약 내 결혼 상대가 나와 똑같은 성격이라면 어떨까.

나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너무 피곤할 것 같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평소 싫어해 온 인간의 형태가 바로 내 옆에 평생 붙어 있는 기분일 것 같다.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를 떠올리게 된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이 자기 안의 불편한 충동이나 결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그것을 타인에게 떠넘겨 보게 된다고 설명했다. 정신분석학은 이를 투사(projection)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내 안에 있는 걸 남의 것처럼 보는 방식”이다. 내가 인정하기 어려운 공격성, 까칠함, 비열함, 열등감 같은 것들을 밖으로 밀어내고, 타인 안에서 발견하는 순간 그 사람을 더 강하게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미움은 정말로 타인을 향한 감정이 아니라, 내가 감당하기 싫은 나를 바깥에서 발견했을 때의 반응일 수 있다. 프로이트 식으로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나는 저 사람을 싫어한다”는 말 뒤에는 때때로 “나는 저런 나를 견디기 싫다”는 고백이 숨어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사회학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찰스 호튼 쿨리(Charles Horton Cooley, 1902)는 『인간 본성과 사회질서』에서 인간이 자기를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반응을 통해 자기를 이해한다고 설명했다.

이른바 거울 자아(looking-glass self)다. 널리 알려진 그의 문장대로, 인간은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니라,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한다고 내가 믿는 바로 그 존재가 되기 쉽다. 이 말은 생각보다 불편하다.


누군가 나를 “까칠하다”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은 단순한 평가가 아니라 거울이 된다.

나는 그 거울을 보며 부정하고, 변명하고, 불편해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나를 본다. 결국 내가 싫어하는 타인은 완전히 바깥의 존재가 아니라,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그냥 싫은 정도가 아니라, 유난히 강한 혐오와 불쾌감을 불러일으킬까.


여기서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의 그림자(shadow) 개념이 들어온다.

융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습들을 무의식의 어두운 영역에 밀어 넣는다. 그런데 그렇게 억압된 모습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을 통해 다시 나타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단점을 볼 때 느끼는 강렬한 분노나 혐오는 단순한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내 안에 억압해 둔 그림자가 건드려진 반응일 수 있다.


이 설명이 무서운 이유는 간단하다. 낯선 사람의 단점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나와 닮은 사람의 단점은 참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건 단점이 아니라 폭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 사람 왜 저래?”가 아니라, “저게 혹시 나도 저렇다는 뜻은 아닐까?”라는 공포가 따라붙기 때문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꽤 끔찍한 결론이 나온다. 내가 지금까지 싫어했던 사람들, 내가 빌런이라고 부르며 멀리하고 싶어 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에 남는 건 타인이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나의 파편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빌런을 욕하면서 계속 나를 욕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쯤 되면 사람이 초라해진다. 나는 늘 누군가를 평가하면서 내가 더 나은 쪽에 서 있다고 믿었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나는 저렇게는 안 살아야지. 적어도 나는 저 정도는 아니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그 말들 대부분은 그냥 나 자신에게 돌려줘도 되는 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내가 조금 못나 보였다. 아니, 많이 못나 보였다. 그래서 요즘 나는 다른 목표를 하나 세우게 됐다.

더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아니다. 그건 너무 자주 실패해서 이제 별로 믿음이 없다.


대신 이 정도면 충분하다. 적어도 나와도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되자.


내 옆에 나 같은 사람이 앉아 있어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사람.
내가 누군가를 보며 느끼는 거슬림이 조금은 줄어들 정도의 사람.
내 안의 그림자를 남에게 뒤집어씌우지 않고도 버틸 수 있는 사람.


그 정도면, 꽤 괜찮은 변화 아닐까. 결국 빌런은 밖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가장 오래 상대해야 하는 빌런은 어쩌면 내 안에 있다. 그리고 그걸 인정하는 순간부터 사람은 조금 덜 오만해진다. 조금 덜 쉽게 남을 미워하고, 조금 덜 쉽게 자기를 속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제 누군가를 싫어하게 될 때마다 한 번쯤은 이렇게 묻고 싶다.

내가 저 사람을 싫어하는 걸까? 아니면 저 사람 안에서 나를 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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