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세 소녀들의 인생 이야기
고등학교 시절 J와 W , 나는 자칭 미녀 삼총사였다. 사실 우리는 그 흔한 땡땡이 한번 쳐본 적 없는 성실한 여고생이었다. 고3, 마지막 야간 자율 학습 날이었다. 마지막 날답게 우리 반 53명 중 꿋꿋하게 자리를 지킨 것은 우리 셋이 유일했다. 교실에 나른함이 찾아들 때쯤, 저녁 식사 종이 울렸다. 도시락을 꺼냈다. 다이어트 중인 나는 반찬통 가득 눌러 담은 밥을 세 번만에 비우고 매점으로 달려갔다.
여느 때 같았으면 줄이 지하 매점에서 2층 계단까지 이어졌겠지만 날이 날인지라 한산했다. 빵빠레를 획득한 우리는 큰 도로가 내려다보이는 2층 계단에 자리 잡았다. 퇴근길 러시아워가 시작된 도로는 반짝이는 불빛들로 가득했고 무엇보다 피처럼 선명한 붉은 노을이 일품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건 우리 셋 밖에 없네. 대단하다. 우리 꼭 성공하자!” J가 말했다. 뭔가 끝까지 해냈다는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붉게 물든 석양아래 삼국지의 도원결의처럼 서로의 굳은 의지를 맹세했다.
그래, 19살의 우리는 좀 멋졌다.
우린 대학만 가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인생은 늘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고 3 때 어머니를 잃었던 J는 대학 입학 후 반년도 지나지 않아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J의 아버지는 세상인심 좋은 분이셨는데 결국 J는 아버지가 여기저기 보증을 섰던 빚을 스무살의 어린 나이에 떠안았다.
W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빚을 갚아야 했다.
아빠의 잦은 실직으로 근근이 살림을 꾸려나가던 우리 집은 ‘바다이야기’ 사건(2004~2006년 나라를 들끓게 했던 사행성 파친고)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마치 우리 셋 중 누구의 신세가 가장 처량한지 키재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세 소녀가 감당하기엔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세상은 우리가 아픔을 추스를 시간을 주지 않았다. 흐르는 강물 속 부유물처럼 시간의 흐름에 속절없이 끌려갈 뿐이었다.
우리는 마지막 야간 자율 학습 때처럼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그 표현은 너무 거창하다. 그저 묵묵히 견디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해냈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세상 탓만 하며 멈춰서기엔 인생은 너무 짧다. 20대의 우리는 그 진리를 알지 못했지만 기특하게도 그 어려운 걸 해내고야 말았다.
어느덧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J는 학원을 운영하여 30대 후반에 경제적 자유를 얻고 조금 이른 은퇴를 했다. W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고, 나는 중학교 선생님이 되어 평범한 나날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부터 완벽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금도 학교에서 먹는 점심이 유일한 아이도 있고, 부모님이 모두 안 계셔서 연로한 할머니와 거주하는 아이도 있다. 추운 겨울, 점퍼 살 돈이 없어 얇은 교복으로 버티는 아이도 있다.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 아버지가 유일한 양육자인 아이도 있다.
그 아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은 '가혹하기만 한 인생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럭저럭 버텨내면 어느새 괜찮은 시간이 찾아온다. 힘들다고 방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문을 열고 나오면 당신의 격려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우리 삼총사가 서로에게 그랬듯이.
만약 20년 전 미녀 삼총사를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끌어안고 "고생했다. 기특하고 대견하다." 토닥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