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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붙박이별 Dec 15. 2023

반짝반짝 빛나는...

반짝반짝 빛나던 첫사랑의 계절이 돌아왔다.

# 너를 만나다.

  창밖으로 노란 은행잎이 햇빛에 반짝인다. 이따금 실려오는 초겨울 냄새,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따뜻한 차 한잔, 그리고 열여덟의 추억... 더없이 완벽한 계절이다.

  A를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아직은 겨울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어느 3월의 봄이었다. 대입을 앞두고 수험생의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학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전혀 낭만스럽지 않은 그곳에서 첫사랑 A를 만났다. 선생님은 수업이 끝날 때 항상 “질문 있는 사람?”이라 물으셨다.

  그 시절 우리에겐 국룰이 있었는데 ‘절대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을 것, 질문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눈치를 밥 말아먹었는지 매 수업시간이 끝날 무렵이면 손을 번쩍 들었다. 결국 머지않아 입시 피로에 쩌든 학원생들의 공공이 적이 되었다.


# 첫사랑, 누구나 로맨스 주인공이 된다.

  그 이후 A는 거의 매일 사춘기 여고생들의 험담 거리로 도마 위에 올랐다. 나중에는 주객이 전도되어 험담 거리를 찾기 위해 A의 모습을 세세히 관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역설적이게도 험담의 핵심 멤버였던 나는 A를 좋아하게 되고 말았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A도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 드디어 역사적인 첫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학원가는 시간은 수험 생활의 단비 같았다. 질문하는 A의 모습은 스마트해 보였고 눈이 마주칠 때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린 서로 약속이나 한 듯 학원이 끝나면 골목 끝에 있는 우리 집까지 함께 걸었고 나는 그 골목이 조금 더 길게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지루하게 비가 계속되던 늦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하얀 옷을 위아래로 맞춰 입고 학원에 간 날 강의실 문을 열자 나처럼 하얀 옷을 위아래로 맞춰 입은 A가 보였다. 그날밤 A와 운명이란 생각에 잠을 설쳤다. '로맨스 드라마의 주인공이 별거냐. 내가 주인공이지.'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모든 로맨스는 항상 갈등 요소가 존재한다. 내 로맨스도 그랬다. 공부에 집중한다는 명분으로 A가 학원을 그만두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긴 것이다. A는 ‘대학 가서 만나자’라는 절절한 내용의 편지를 남긴 채 떠났다.


# 반짝반짝 빛나던 청춘의 기억

  시간은 빠르게 흘러 11월, 수능일이 다가왔고 그날 저녁 A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 로맨스의 2막이 시작된 것이다.

 그해 겨울, 우리는 함께 영화도 보고 첫눈을 맞았으며, 따끈한 군고구마도 함께 먹었다. 영업이 끝난 야외 아이스 링크장에서 썰매도 탔다.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반짝반짝 빛나던 계절이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여느 로맨스 소설과는 다르게 내 로맨스는 새드엔딩이었다. 서로 다른 대학교를 진학하며 설레던 첫사랑은 바쁜 일상 속에 빛을 잃었고 서서히 잊혀갔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은 희미해졌지만 그 시절 반짝반짝 빛나던 청춘의 기억은 노란 은행잎이 반짝이는 계절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나를 찾아온다. 누군가 물은 적이 있다.

"너는 첫사랑이 그리운 순간이 있어?" 그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첫사랑이 그리운 게 아니라 그 시절의 내가 너무 순수하고 예뻐서 눈물나게 그리워."

 A에게도 이 계절이 반짝임으로 기억되길, 더없이 순수하고 완벽한 계절이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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