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에 서툰 편이다. 울고 있는 사람에게 “울지 마”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힘들어하지 마” 이런 뻔한 말 말고 좀 더 대단한 위로를 해주고 싶은 마음만 앞서 기본적인 위로 조차 못하고 만다. 장례식장에 조문을 가서도 상주분에게 딱히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고개 숙여 인사만 두 번, 세 번 조아려 산 사람까지 고인을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위로에 서투른 건 나 자신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계산이 안 선다. 어렸을 땐 세상이 쉬워 보였다. 원하면 가질 수 있었고 꿈꾸면 이루어졌다. 우울한 날도 꽤 괜찮았다. 우울한 만큼 보상을 해주었으니까. 피곤하면 에스테틱에서 관리받으며 숙면을 취했고 백화점에서 양손에 쇼핑백 한가득 들고 나오는 그 묵직한 느낌을 즐겼다.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고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 부모님 울타리 안에서 곁눈질로 본 세상은 내가 주인공 같았다.
이런저런 집안의 일들이 있었다. 나의 최대 안전장치였던 부모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자 더 이상 나는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나는 세상에서 그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점 하나에 불과했고 그것도 중심부에 찍힌 점이 아니라 저 멀리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점이 되었다. 자존감이 하늘을 찔렀던 만큼 고공낙하하는 그 시간을 오롯이 견뎌내야 했다. 무언가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그렇게 심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골프를 배우게 되었다. 재정적으로도 압박이 있던 시기에 돈이 많이 들어가는 취미가 모순이기는 했지만, 필드를 한번 나갔다 온 이후로 운명처럼 빠져들었다. 유일하게 나를 위로해주는 무언가가 골프였다. 일단 하루가 잘 갔다. 슬픔과 상념에 빠져 있으면 지루하게 길었을 하루가 좋은 사람들과 함께 풀 위를 걷고 반신욕을 하고 식사를 하고 나면 얼추 하루가 다 지나 있었다. 난 그렇게라도 하루하루를 재빨리 지워야 했다. 하루를 지우기 위해 시작했던 골프가 내 하루를 다시금 채우고 있었다. 치면 칠수록 인생과 닮아있는 골프의 매력에 흠뻑 취해 흔들거렸다.
그때의 꿈은 싱글 한번 치고 죽는 것이었다. 드디어 6년 차 때 첫 싱글을 기록하고 그 이듬해 1 언더까지 쳐내는 위엄을 달성했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던 그 새로운 안전장치도 수명이 다해갔다. 골프 동호회에서 알게 된 형과 사업을 진행하다가 돈을 못 돌려받아 생긴 상처는 애먼 골프까지 타박하게 된 것이다. 골프를 치지 않았다면 그 형을 만나지 않았을 테니까. 하는 생각을 하니 골프가 권태기를 맞은 연인을 대할 때처럼 아무 감정이 없어졌다.
그러고 보면 영원한 안전장치는 세상에는 없는 것 같다. 영원을 가능케 하는 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니까.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곳곳에 안전장치를 심어두는 수밖에….
그래서, 기도한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위해.
감사할 수 있으면 세상 그 어떤 작은 것도 안전장치가 된다. 무심코 지나치는 로스팅 카페 앞, 에티오피아 산 원두의 이국적인 향이 봄바람에 실려와 내 콧등에 머무는 것도 기쁨이 되고, 내 맘을 그 누구보다 잘 헤아려주는 유튜브 알고리즘도 위로가 되고, 딱 그 시간에 기적처럼 만나 인연이 된 타임 특가 세일 택배 상자도 안식이 된다. 오늘 액정 너머로 본 마켓컬리의 잇템이 내일 아침이면 내 품에 안기는 것 또한 기분 좋은 선물이다. 오늘은 나보다 앞서가며 연 문을 내가 지나갈 때까지 잡아주신 어떤 배달원분의 친절에 마음이 쉬어갔다. 또 그렇게 놓고 보면 인간의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돈이지만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인류애가 아닐까 싶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에 꽃불을 지를 수 있는 사람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