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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 Aug 09. 2020

그래, 이제 내가 도슨트다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Intro. 나다운 것이란?


나는 어릴 적부터 자연보다는 사람에 관심이 많았다. 


자연의 구조를 파헤치는 것보다는 자연의 흐름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행동이나 감정, 생각에 관심이 많았다. 때론 아무 생각 없이 공원이나 카페에 있는 사람들을 멍하니 관찰하는 일도 많았고, 과거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현재에 대입해서 교훈을 얻는 것도 즐겼다. 물론, 이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에 대한 관심이었다. 


이런 배경의 나는 대학시절 역사를 전공했다. 적성과 관계없이 성적에 맞춰 들어간 게 아니라 정말 역사 공부를 좋아해서 전공했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역사 공부가 시험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암기 위주로 진행된 부분이 컸다면 대학에서의 공부는 한 가지 사회현상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의견 나눌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고, 세상만사를 역사 책의 한 줄 문장으로 일반화하지 않아도 됨에 매력을 느꼈다. 






S#1. 나는 역사학도였다


사학과에서는 여러 가지 이벤트가 있었는데, 매년 여름방학이면 역사기행을 떠났다. 기행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한 여행 같은 개념은 아니었고 역사 속에서 의미 있는 주제를 하나 정해서 기행을 떠나기 전 한 달에 거쳐서 학습과 토론을 하고 일주일 정도 역사를 주제로 떠나는 기행이었다. 


처음 새내기 때는 뭣도 모르고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제주도를 갔던 기억이 있다. 당시 주제는 한국 근현대사 속 제주의 아픔을 살펴보고 추모하는 것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제주에서 이루어졌던 군사용 비행장 건설 등 일본에 의한 각종 인력동원과 해방 후 4.3 항쟁의 기억들을 따라가는 일정이었다. 교과서 속 한 줄 문장으로 기억하던 역사적 사건을 배경지식과 함께 현장에서 체감하니 여운이 남달랐다.






S#2. 먹고사는 문제


전공에 재미를 붙여서 나는 자율적으로 공부했다. 굳이 시험이라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관심 있는 부분은 책을 찾아보고 지식의 깊이를 더해나갔다. 그런데, 이후 진로를 생각해야 할 시점이오니, 여러 가지로 막막한 게 많았다. 사실 나는 전공 공부를 더 해서 교수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과 활동을 부지런히 하면서 지켜본 결과 교수가 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강의 실력이 뛰어난 선배들도 석박사를 마치고 오랫동안 시간 강사나 계약직으로 있는 경우들이 허다했고, 현실적으로 정교수 자리는 정말 적었다. 나는 고민했다. 과연 내가 이렇게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도 연구자의 길을 가면 버텨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의문이 들었고, 결국 나는 그 길을 포기했다. 


도저히 감당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고백하건대 현실과 타협했다. 내가 좋아하는 인문학적인 요소를 활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눈에 들어온 것이 여행업이었다. 






S#3. 외면했던 시간들


그렇게 나는 내가 그토록 관심 가지고 풀려고 했던 주제들에서 멀어져 갔다. 이게 당장 나의 캐리어에 도움이 될까를 우선적으로 생각했고, 취업을 위한 스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남들처럼 취업 준비라는 명목으로 영어 점수를 따기 위해 공부했고, 입사지원서를 썼다. 여행을 통해 행복한 삶을 만들겠노라는 청운의 포부를 가지고 목표했던 회사에 입사도 했다. 


그런데, 여행업의 실무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달랐다. 


구체적으로 여행업은 여행 비즈니스이기에 상품을 기획하거나 유통채널을 관리하고 확장해나가는 일이 주 업무였다. 매일같이 부딪히는 문제들은 어떻게 해야 유통채널을 확장하고 매출을 올릴 수 있으며, 수익성을 개선하는가에 대한 보편적인 비즈니스의 주제들이었다. 하지만 열심히 했다. 맨땅에 헤딩이라고 마케팅 기획서도 써보고, 없는 예산을 바탕으로 기획행사도 해보고, 제휴 업무도 해보고 등등. 그런데, 또 마음 한편으로는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의문이 드는 시간이었다.






S#4.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 도슨트 지원


이렇게 7년 차 직장인이 됐다. 신입 때처럼 열정 가득한 순진함은 사라진 지 오래이고, 이젠 후배들도 많이 생겼고, 멘토링이니 뭐니 하며 내가 조언해 줘야 하는 일들도 자주 생겼다. 이런 찰나에 박물관 도슨트 모집공고를 보게 됐다. '국립 일제 강제동원 역사관' 이름도 긴 이곳은 부산 남구 대연동에 위치한 곳으로 주변에 UN 평화공원을 비롯해서 각종 역사관과 공연장이 모여있는 부산의 문화 중심지였다.


위치도 위치지만 오랫동안 외면하고 있던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이랄까.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한 강제동원의 진실을 이해하고, 사람들에게 알린다는 것에 대한 소명의식이 느껴졌다. 그래서 공고를 보고 바로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피터






S#5.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 교육 & 테스트


지원서를 내고 보름의 시간이 지났을 즈음, 교육 대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틀에 걸쳐 진행된 교육은 박물관 운영 및 강제동원에 대한 강의와 도슨트 선배님들의 시범 해설로 진행되었다. 특히 도슨트 선배님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해설은 참으로 배울 점이 많았다. 단순히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눈높이에 맞춰 적절한 비유를 들어 강제동원의 실상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셨고, 지식을 전달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도슨트 교육  ⓒ피터


이렇게 교육을 듣고 최종 관문으로 해설 테스트가 있었다. 교육에 참석한 60명의 인원 중 절반 정도만 최종 선발된다고 했고 테스트는 개인별 스케줄로 진행됐다. 사실, 나는 PT에 나름 자신이 있었지만 선배 도슨트를 포함한 심사위원들 앞에서 하는 테스트는 이상하게 긴장이 많이 됐다. 


그래서 전시관의 공간을 구역별로 나누고, 어떠한 해설을 어떻게 전달할지에 대해서 수없이 구상하고 공부했다. 숲을 보고 나무를 봐야 하는 구간이라면 전체적인 시대 배경에 주목했고, 역사관에 와서 볼 수 있는 유물들에 대한 설명이 중요하다면 그러한 나무에 주목하자는 전략이었다. 그렇게 해설 테스트 날이 왔고 나는 내 나름의 해설을 풀어나갔다.

 





S#6. 그래, 이제 도슨트다


테스트를 위해 준비한 게 100이었다면 실제로는 반도 못 했던 거 같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통해 단순히 제국주의 일본을 미워하고 배척하기보다는 당시 강제동원의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에 의해 피해를 받은 아시아, 태평양권의 나라들의 사례들과 더해 인류 보편의 인권과 평화에 대해서 관심을 촉구하고 국제사회에 이슈화하여 개선해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 그렇게 테스트는 끝났고 심사위원의 현장 피드백이 이어졌다. 


선생님 한 분이 말씀하셨다. 


"감명 깊게 잘 들었습니다" 

"혹시, 도슨트에 지원하신 동기가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단순한 질문인데, 나는 순간 한참을 머뭇거렸다.


"제가 정말 관심 가지고 공부한 역사가 돈벌이가 안된다는 이유로 대중들에게 외면당한다는 게 싫었습니다." 

"물론, 저도 그러한 사람 중 하나였고요." 


"애써 외면하고 있는 제 자신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늘 마음의 빚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도슨트 공고를 보게 됐고,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테스트를 마쳤다. 그리고 또 보름의 시간이 흘러 박물관에서 연락이 왔다. 최종 합격 공지였다. 입사시험에 합격한 것과는 또 다른 측면에서 벅찼다. 한동안 외면하고 살았던 나다움을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나 할까. 일반적인 직장인의 삶에서 소정의 시간을 할애해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고 설레었다. 


물론, 코로나로 인해 당장에 많은 일들을 하진 못하겠지만 앞으로는 먹고사는 문제를 핑계로 내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로 살지만은 않겠노라고 다짐해본다.


역사관 건립 목적  ⓒ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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