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탄. 덕업 일치 2.0
1. 사내강사 : 테마 강의, 어쩌다 피아노
막상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받으니, 관심사에 대해서 제대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크숍을 마치고 부산을 내려가기 전 압구정 로데오역 근처에 위치한 풍월당을 찾았다. 풍월당은 서울에 올 때마다 꼭 들르던 곳으로 클래식 음반부터 책과 카페 그리고 전용 강의장까지 클래식에 대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던 영감의 공간이었다. 바흐부터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까지 전설적인 클래식 음악가들을 마주하면서 사내 전문가로서 클래식을 어떻게 정의하고 풀어나가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 후 부산에 오자마자 대형서점으로 가서 클래식 음악과 관련된 여러 가지 책들을 살폈다. 예전과 달리 딱딱한 이론서가 아닌 교양 관점에서 쉽게 풀어쓴 책들이 많았다. 나는 무엇보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전반적인 개념 정리가 필요했기에 클래식의 정의부터 시대 별 변화상이 정리된 책들을 몇 권 골랐고, 틈틈이 읽어나가면서 정리의 시간을 가졌다.
클래식 음악이 사실 유럽의 귀족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장르였기에 신 중심의 중세 이후 인간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난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당시의 예술사조에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바로크, 고전,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선되는 가치와 음악적 스타일이 많이 달랐다. 예를 들어 바흐나 헨델이 활동하던 바로크 시대에는 왕실의 행사를 담당하는 궁정 음악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이 베토벤을 기점으로 예술가 본인의 창의적 역량이 강조되는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한 형태의 발전을 이룬 점을 볼 수 있었다.
형태적인 측면에서 보면 악기의 사용 유무에 따라 성악과 기악으로 나뉘었고, 기악은 연주 형태에 따라 2개 이상의 악기들이 대립하듯 연주하는 협주곡(Concerto)과 관악기와 현악기 및 타악기로 연주되는 오케스트라인 관현악곡(Orchestra), 그리고 다악장의 교향곡(Symphony)으로 나누어 볼 수 있었다. 우리가 흔히 공연장에서 보는 대규모의 클래식 공연은 '심포니 오케스트라'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이는 여러 악장의 곡을 다루는 대규모 관현악단을 지칭하는 단어로 얼마 전 MBC <놀면 뭐하니?>에서 유재석이 하프로 도전했던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모습을 연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스스로를 위한 학습의 시간을 가지고 있던 때, 인재개발부에서 연락이 왔다. 테마 강의를 열 예정이라 강의를 준비해 줄 수 있냐는 요청이었다. 당시에 한 달에 한 번씩 테마 강의를 연다고 사내에 공지가 나갔고 첫 번째 테마 강의 후, 직원들의 호기심 어린 관심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나는 그다음 달에 진행하는 강연에 참가하는 일정이었고 그때는 아로마, 사진, 작곡, 낚시를 테마로 강의들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했다.
연락을 받은 시점에서 강의 날까지 약 3주 정도의 시간이 있었는데, 한 시간 정도의 강연을 채울 목차부터 구상에 들어갔다. 나도 전문가가 아니기에 테마에 대한 애정을 가진 준전문가의 입장에서 어떤 도입부로 관심을 끌고, 클래식 음악에 대한 매력을 전할지 여러 가지 생각들을 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고민 끝에 최종적으로 아래와 같이 목차를 정했다.
피아노라는 악기에 대한 각자의 기억을 소환하면서 클래식 음악의 개념을 정의하고, 중세 이후 시대별 변화에 따른 작곡가들의 대표곡과 삶을 들려 주자는 구성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피아노 배틀 장면으로 유명한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보여주고, 내가 연주한 쇼팽 왈츠 영상을 보여주고자 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 강의를 통해서 피아노가 주는 심리적 안정감을 전하고 싶었고, 클래식 작곡가와 음악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삶에 대한 용기를 북돋아주고 싶었다.
비록, 직원들 앞에서 한 소규모 강의였지만 나는 강연자의 입장에서 나의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단순히 나 혼자 좋아하는 테마에서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면서 같이 호흡하기 위해서는 내가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이러한 분류의 과정에서 공부를 더해나가면서 나의 내면이 더 단단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값진 경험이었다.
강의 외에도 테마 엑스퍼트 본연의 목적인 테마 여행상품을 개발하기 위해서 많은 조사들을 이어나갔다. 나는 당시 2030 세대를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던 유료 살롱 모임의 문제의식에 주목했다.
트레바리 같은 독서모임부터 합정에 있는 취향관 등 한 번의 모임에 4~5만 원 이상의 비용을 내면서도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고, 사람들이 일에서 자아실현을 하기 어려워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유료 살롱 모임들은 일정 비용을 내고 사전에 감상문, 학습 등 개인에게 과제가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미션들을 수행하고서라도 관심사가 맞는 사람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하고 성장하는 경험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살롱문화와 클래식 음악이 잘 맞아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살롱 모임들의 진행 형태를 살펴보면 평생직장의 개념이 점차 무뎌짐에 따라 10대의 살롱이 취미를 만들고, 2030 세대가 취향을 나누는 장이라면, 4050 세대는 지식 습득의 열망을 충족하기 위한 인문학 놀이터로 나아간다는 점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이란 공통분모를 통해 관심사를 공유하고, 경험을 깊이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을 제공하고자 했다. 주요 타깃은 회사 브랜드의 주요 고객층인 5060 여성층이었다. 기존에도 이런 테마를 다루는 상품들이 많이 있었지만 차별점은 여행 전 사전모임부터 시작해서 클래식 음악에 대한 개개인의 경험을 체계적으로 나누고, 유럽 현지에 가서 밀도 있는 여행 프로그램들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이러한 여행상품들을 통해서 대중적인 휴양형 여행 프로그램이 아닌 세밀한 테마 분야의 여행에 있어서도 회사의 강점이 있다는 것을 시장에 어필하고 싶었고,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테마를 향유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지속적으로 소통해나갈 수 있는 커뮤니티를 운영해나가고 싶었다. 가치 있는 연결에 관한 문제였는데, 관심사를 중심으로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연결되는 기쁨을 누구보다 많이 겪어본 나였기에 이러한 경험 상품을 짜 보고자 했다. 그리고 깊이 있는 대화의 희열을 통해 여행의 기쁨을 더 늘려가고 싶었다.
추후, 나는 회사의 애자일팀에 합류하면서 최종적으로 '클래식 살롱 In 베를린'이라는 여행 상품까지 만들어 볼 수 있었다. 물론 코로나로 인해 해외여행이 막히고, 유럽의 클래식 음악축제 및 공연들이 연기 및 취소 되었지만 이러한 축적된 경험들이 추후 새로운 기획을 해나가는데 다시금 강력한 인사이트로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모든 것은 아직 진행형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