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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 Jul 12. 2020

Agile Team에 합류하다

종합여행사 애자일팀에서의 3개월

1. 서울로 발령이 났다


2019년 10월 1일, 나는 회사의 애자일팀으로 발령이 났다.


정확히 말하면 애자일팀 사내공모에 지원했고, 최종 합격했다. 2013년 입사 후 줄곧 부산에서만 근무하던 나는 6개월 한시적 운영이란 조건으로 서울행 KTX에 몸을 실었다. 회사에서 애자일팀을 운영하게 된 배경은 해외여행을 가는 출국자수는 계속해서 증가하는데, 회사의 캐시카우인 패키지여행 판매가 줄고, 자유여행 트렌드가 확대되면서 고객이 원하는 킬러 상품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였다.

    

회사의 주요 전략 중 하나였던 조직인만큼 지원도 좋았다. 회사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았음에도 본사 건물이 아닌 전망 좋은 종로타워의 공유 오피스에 업무공간을 마련해줬고, 전 팀원이 MD이자 PO(Product Owner)로 수평적이며, 자기 완결적인 조직을 지향한다고 했다. 팀원 간에 호칭도 영어로 한다고 해서 나도 '피터 Peter'란 이름을 하나 정했다.


설렘과 기대를 안고 첫 출근한 날, 마치 새로운 회사로 이직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일하는 방식부터 일에 대한 정의까지 다 다르고 낯설게 느껴졌다. 애자일팀 2기로 합류한 나 포함 4명 외에 기존 팀원 4명까지 나이대가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으로 상당히 젊었고, 처음엔 시끄럽다고 느낄 정도로 팀원들끼리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했다.


근무했던 공유 오피스  ⓒ 피터






2. 애자일팀의 일하는 방식


업무 스케줄은 매일 아침 09시 30분 데일리 미팅으로 시작했다.


이때는 각자 간단하게 자신의 하루 업무를 팀원들에게 공유하고 첨언하는 시간이었다. 업무 사이클은 주간 단위로 이루어졌는데 스프린트를 짜서 한주에 진행할 업무 목록을 기록하고 관리했다. 또한 매주 수요일에는 애자일 코치들과 PO미팅이란 것을 통해 업무 중 특이사항이나 애로사항들에 대해서 논하고 지원받았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에 스프린트 회고라는 것이 있었는데, 말 그대로 한 주간의 스프린트 계획과 산출물을 비교해 보면서 업무가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개선점을 찾아보는 시간이었다. 애자일이란 형태 자체가 시장환경이 급변하는 실리콘밸리의 IT스타트업에서 나온 개념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빠른 기획과 실행이 중요했다.

 

팀원들은 각자가 1인 MD이기 때문에 곧바로 신상품 기획에 들어갔다. PT를 해야 했는데, 나는 오랫동안 관심의 대상이었던 클래식 음악 여행을 아이템으로 했다. 기존 클래식이란 무거운 편견을 깨는 친근하고 쉽게 즐길 수 있는 음악여행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나온 나의 기획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주요 공연을 관람하는 투어였다. 여행 전 한국에서 전문가와 함께 사전모임을 통해 배경 지식을 익히고, 베를린에 가서는 공연 관람 후 앤틱 한 카페에서 참석자들과 인사이트 토크라는 깊이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두었다. 약간... 관심사 중심으로 뭉치는 소셜 살롱의 해외 확장판이랄까.


애자일팀의 일하는 방식  ⓒ 피터






3. 반응을 얻지 못한 나의 기획안 : Drop의 기로에서


드디어, PT 당일이 밝았다.


전날 밤까지 카페에서 여러 번 수정한 자료를 들고 출근했다. 먼저 발표한 동료들의 기획안을 보니, 발리 우붓의 요가 하우스에서 요가 수업을 받고 요리하며 온전히 시간을 즐기는 '리트릿'이란 개념도 나왔고, 일반적인 여행 상품에서는 잘 다루지 않던 멕시코시티 집중 투어 아이디어도 나왔다. 하나 같이 참신해 보였다.


내 차례가 돼서 생각했던 신상품 기획안에 대한 문제의식과 상품 구성을 이야기했고, 본격적으로 여러 가지 질문들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사실, 여행에서 테마라는 것이 그 테마를 알고 즐기는 사람에겐 한없이 매력적이지만 관심 없는 사람에겐 반응을 일으키기 어려운 특성이 있다. 그래서 질문들의 공통된 기준은 시장성과 수익성에 있었다. 이러한 테마나 구조의 상품이 수요가 있을지, 고객이 차별화된 가치를 느껴 구매할지, 현실적으로 상품화가 가능할지 등.


마치 스타트업 대표가 사업 아이템을 가지고 벤처캐피털 심사역들에게 투자를 얻기 위해 발표하는 느낌이랄까. 기획에 대한 논의가 끝나면 'Go' & 'Drop' 결정을 하는데 결론적으로 나의 기획안은 향후 질문들에 대한 추가 답변을 듣고 결정하자는 방향으로 정해졌다.


사실,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한 나는 충격을 받았다.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아이디어였고 소싯적부터 PT에 남다른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참담했다. 내 아이디어나 근거가 충분히 설득력이 없었나 하는 생각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오후에 부서장님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피터~. 오늘 준비한 자료 잘 봤어요~


클래식에 대한 취미,

그걸 바탕으로 조금 더 테마성 있는 준전문가 대상의 상품을 만든다는 것에는 굉장히 동의합니다.


아무래도 회사이고,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니, 시장성과 수익성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어요.

오늘 오갔던 질문과 답변들 사이에서, 분명히 기존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더 봤을 거라 생각해요.


오늘과 같은 분위기가 어쩌면 애자일의 장점이고, 차별점이라 생각해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 피터가 생각했던 것들 많이 많이 제안하고 토론하고.. 발전시킬 수 있으면 좋겠어요."






4.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을 보여줘야 하나?


뭉클했다.


멘붕과 함께 의기소침해져 있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무엇이 문제고, 어떻게 보완해야 할까?" 기획이라는 게 아이디어가 상품화될 수 있도록 구체화하는 과정이라고 봤을 때, 프레젠테이션에 꼭 표현해야 할 요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요소들을 조사하고 지표화 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들이었다.


우선 수요가 있다는 것을 정량적인 지표로 어필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러한 데이터를 보여줄 만한 것이 잘 없었다. 국내의 예술 공연과 관련된 통계 자료를 살피고, 공연 장르 별로 소비되는 현황과 특이사항이 어떤 지를 살폈고, 베를린 필하모니의 2020년도 공연 스케줄과 베를린 현지에서 고객들을 이끌어줄 전문성 있는 가이드분을 수소문했다.     


이렇게 나는 2차 PT를 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부서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이게 상품화되기가 적절한지에 대해서. 나는 우선 클래식이란 장르에 대한 재해석을 했다. 클래식이란 장르 자체가 오랜 시간 동안 전문직군 혹은 사회 상류층의 고상한 취미활동으로 여겨진 인식이 강했으나, 이는 바꿔 말하면 분명히 구매력이 있는 가망 타깃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예술 공연 소비 현황을 보면 클래식은 타 장르와 달리 확실히 대규모 공연 위주로 구매 전환율이 높았다. 이는 공연 중에서도 네임 밸류가 있는 빅 이벤트 위주로 많이 소비된다는 것을 지표상으로 알 수 있었다. 결국, 각고의 노력 끝에 상품화를 위한 Go 사인을 받았다. 이제는 빠르게 시제품을 만들고, 시장에 테스트를 해봐야 할 차례였다.


끝없이 수정되는 나의 기획안  ⓒ 피터






5. 산 넘어 산, 이제는 웃으며 되돌아볼 수 있다


하...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난관의 시작이었다.


햄버거 가게를 예로 들면 좋은 세트메뉴를 만들기 위해서는 신선하고 맛있는 단품들이 많아야 하는데, 기획한 세트 메뉴대로 묶어낼 단품을 찾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지역이 베를린이다 보니 시차도 큰 유럽지사와 계속해서 메신저 보내고 통화하면서 요구사항을 전했고, 답변을 받고 수정사항을 전하는 과정들을 반복했다. 팀 내에서 OK 사인이 난 상품 안임에도 불구하고 유럽 현지 지사에서는 계속해서 반문했다.


"이런 상품을 왜 해야 하는지?", "원하는 조건의 가이드는 섭외가 어렵다", "더 이상 경쟁력 있는 금액의 구성은 어렵다" 등. 10가지를 요청하면 답변 속도도 속도지만 1~2가지만 해결이 돼도 굉장히 큰 성과였다. 이러다 보니 진척사항이 굉장히 느렸고, 일단 기획부터 콘텐츠 정리, 상품 세팅, 초기 마케팅, 제휴 안 등 Product 출시의 전 과정 중 PO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동시에 조금씩 다 건드렸다. 어디서 먼저 답이 오고 실마리가 풀릴지 모르니, 할 수 있는 건 다해보자는 식이었다.


그 후, 어렵게 하나씩 문제들을 해결하고 2020년 1분기 출발을 목표로 상품을 세팅했다.


구체적으로 모습을 갖추어 갔으나 회사 내부 사정 및 코로나 19의 여파로 아쉽지만 나는 조기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3개월 간 애자일팀에서 일하며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민하고, 토론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올 초에 부산으로 다시 내려온 후에는 가시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실패했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그리고, 수개월의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그때의 경험을 회고해보면서 최근 내 삶에서 그때만큼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고민하고, 실행했던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얼마나 오래 일하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기간 내에 어떠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행하느냐에 따라 성장의 폭이 달라진다는 조언을 기억하면서.

  

<클래식 살롱 In 베를린>  최종 기획안 표지  ⓒ 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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