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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터 Sep 29. 2020

회사에서 취미생활을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1탄. 덕업 일치 1.0

1. 입사 6년 차, 심신이 지쳐있던 순간들


많은 직장인들이 보통 근속 3,6,9년 단위로 슬럼프를 겪는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 말을 안 믿었다. 나는 나의 업에 대한 애정도 강했고, 이 일을 본질적으로 잘해서 부가가치도 많이 만들어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도 어느 순간부터 매너리즘의 순간이 조금씩 찾아왔다. 내 의사와 관계없이 갑자기 팀이 바뀌고 비합리적인 상황에 반복적으로 처하고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자는 생각으로 출퇴근하기를 반복하는 순간이 온 것이었다. 


나의 성장과는 관계없는 감정노동들이 쌓이다 보니,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게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고 책 속에서 봐왔던 합리적인 비즈니스 이론이 현실에는 그다지 적용되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계속 들었다. 더군다나 나를 제일 크게 괴롭혔던 건 나아지지 않고 정체된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었다. "내가 얼마나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고 이런 상황들을 감내하면서까지 이 일을 해야 하나" 란 생각을 많이 했고, 그게 딱 6년 차를 시작할 때쯤이었다.






2. 공허한 마음을 피해 접한 피아노


이런 싱숭생숭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때, 나는 취미를 하나 하고 있었다. 


퇴근 후 일에 대한 잔상이 남는 게 싫어서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는데 한 달만 해보고 재미없으면 관두려고 했던 것을 꽤나 오랫동안 하고 있었다. 사실 피아노를 할 줄 알아서 시작했다기보다는 어렸을 때 한 번이라도 접해본 악기가 피아노 밖에 없어서 선택을 했다. 초등학생 때 잠깐 배운 게 전부라 사실상 처음부터 한다고 봐야 했지만 결심이 섰기에 집 근처 보습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보습학원은 어린 학생들 위주라 그런지 직장인인 나의 방문을 부담스러워하는 원장님의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성인 전문으로 취미 음악학원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그렇게 나는 피아노 학원을 등록했다.


성인 취미 학원은 바이엘, 체르니 같이 이론적인 수업으로 진행하기보다는 수강생의 수준에 따라 연주하고자 하는 곡 중심으로 레슨이 이뤄졌다. 물론 첫 레슨 때 강사님과 나는 서로 말똥 말똥 말없이 쳐다보며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방황하던 순간이 있었지만 어릴 적 고이 모셔뒀던 '김형중 - 그랬나봐' 악보를 꺼내가면서 해당 곡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피아노를 배워가면서 점점 심적으로 안정된다는 느낌을 받았고, 이상하게 나랑 잘 맞았다. 그래서 새로운 곡을 배우고, 또 새로운 곡을 배우면서 좀 더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 피아노 학원에는 크게 클래식과 재즈 두 가지 장르의 강사님들이 있었는데 나는 클래식 강사님한테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가요나 뉴에이지 곡만 배우다가 시간이 지나니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거 같다.


"그래, 클래식의 클도 모르지만 클래식 강사님한테 클래식을 한번 배워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쇼팽을 만났다. 내가 평소에 낭만 타령을 하니 강사님이 쇼팽이 어울릴 거 같다며 쇼팽의 왈츠를 배워보자고 하셨고 나는 엄청 복잡해 보이는 왈츠 악보를 오른손 한번, 왼손 한번 수없이 반복하며 익혀 나갔던 거 같다. 






3. 테마 엑스퍼트 모집


클래식곡을 배워가면서 클래식 작곡가와 관련된 배경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는데 이게 또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으로 시작했으나 음악의 성인, 베토벤의 음악과 또 그의 생애를 알게 되면서 귀가 들리지 않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초인적인 의지를 가지고 재능을 예술로 승화시켜나간 삶에 대한 불굴의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테마 엑스퍼트' 모집공고  ⓒ피터


그러던 중 회사의 공지를 접했다. '테마 엑스퍼트'라는 사내 전문가 제도였는데, 기존의 직무전문가 제도였던 '하나 엑스퍼트'와는 달리 자신의 취미나 특기 분야에 대한 전문가를 선발해서 테마 여행상품 기획 및 강연 등의 활동에 참여하는 지원 제도였다. 사실 공고를 보고 좀 신기하기도 하고, 이젠 취미도 회사에서 관리를 하는가?(웃음) 하는 생각도 했던 거 같다.


'테마 엑스퍼트' 역할  ⓒ피터


그래서 관심은 갔으나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안 그래도 매너리즘에 빠져 세상만사가 귀찮을 때여서 무언가 자극이라도 받아보자는 생각에 지원서를 냈고, 인재개발부의 심사를 거쳐 나는 '피아노/클래식'분야 엑스퍼트로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나의 취미를 관리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4. 덕밍 아웃, 40명의 덕후를 만나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나는 덕밍 아웃을 했다. 


첫 워크숍을 하기 위해 갔을 때 전사에서 선발된 40명의 직원 엑스퍼트들과 자기소개를 했던 시간이 아직까지도 참 인상이 깊다. 트레킹, 스킨스쿠버, 자전거와 같은 레포츠 분야부터 수제 맥주, 와인과 같은 식문화 분야와 재즈, 발레 등의 공연예술 분야까지 "우리 회사에 이렇게 다양한 취미를 하는 분들이 있었구나!"라는 감탄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소속 팀에서 직급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관심사를 기반으로 살롱 모임처럼 만나니 엑스퍼트분들과 생각을 교류하는 과정들이 재미가 있었다.


덕밍 아웃(회사에서는 우리를 이렇게 소개했다)  ⓒ피터



테마란 자신이 좋아하고 즐기고 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CEO Message 중)



엑스퍼트의 역할은 크게 아래 4가지였는데, 사실 회사에서는 장기적으로는 테마상품 개발에 가장 큰 중점을 두고 있었다. 기존에도 세분화되는 고객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 다양한 테마 여행상품을 기획하고 수정을 거듭해왔지만 좋은 상품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았고, 만들어진 상품을 적합한 고객 커뮤니티에 전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소위 참 품이 많이 들어가는 과정들이었다. 그래서 테마(관심사)를 중심으로 상품 기획과 유관 커뮤니티에 대한 접근을 관심 있는 사내 직원들을 통해 활성화시켜보자는 취지가 컸다. 


테마 엑스퍼트 역할  ⓒ피터


그리고 무엇보다 테마라는 것이 한 가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테마들과 섞이고 연계될 때 나올 수 있는 가치들에 주목했다. 예를 들면, 와인과 사진 테마의 연계성을 연구해 본다던 지 클래식과 재즈의 관계를 연구해 본다던 지 등의 시도들이다. 


이런저런 문제의식들을 공유하면서 한 해 동안의 계획을 세워보는 시간을 가졌고 당장에 실행하기보다는 하나씩 실력을 쌓아가며 만들어나간다는 개념이 컸기에 각각의 엑스퍼트들은 완급 조절을 하며 덕업 일치를 위한 활동들을 이어나갔던 거 같다. 물론, 활동을 하게 되면서 작게는 내가 익히는 취미분야에 대한 도서비용부터 각종 활동비 지원들이 가능했고 추후 강의를 하거나 콘텐츠를 만들면 그에 대한 보상이 따르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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