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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톰 Aug 30. 2015

하일, 히틀러

인류 역사를 스쳐온 인물 중엔 위인도 있고 악인도 있으며 우리도 있다.
항상 밝은 면만 강조되고 어두운 면은 덮어두는 등 미화되어 비판이나 재평가가 차단된 인물들의 독서 감방에서 탈출하여 인류 역사상 최악의 인물을  조명해볼까 한다.

35세 때 뮌헨 폭동으로 인하여 수감된 형무소 생활중 집필한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서술된 몇몇 문장만으로도 그의 생각이나 도덕성을 읽을 수 있다.

<가장 쉽게 승리하는 방법은 이성을 넘어서는 테러와 폭력이다>
<거짓말을 할 바에는 확실하고 거창하게 하라>
<인구의 증가에 맞춰 영토를 확장하는 일에는 피와 전쟁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가장 정당한 방법이다>

인용, 자기과시, 이해 안 되는 문장의 반복으로 채우진 나의 투쟁은 일부 정치가들의 입문서는 될 만하다.

나의 투쟁


히틀리는 오스테리아 태생이다 (1889년)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가 특별히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성장에 영향을 끼칠만한 몇 가지 문제는 있었다.
난폭한 술 주정뱅이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하고 자랐으며 학교 성적은 낙제생 수준이었다.
16세 때 아버지가 죽자 학교 생활을 그만두었고 중졸 정도가 그의 최종 학력이 되었다.
그러나 그림에는 어느 정도 소질이 있어
화가를 꿈꾸며 19세 때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에 응시하였으나 연이어 낙방하였고 깊이 낙담한 히틀러는 집에는 합격하였다는 거짓말과 함께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는 노숙자 신세가 되어 비엔나의 거리를 떠돌았다.

<보는 것은 무엇이던지 부당하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고집대로 하지 못하면 매우 화를 냈고 친구도 없고 누구와 사귀려고도 하지 않는 점점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가 되어갔다/알로이스/히틀러의 이복동생>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그가 좀 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미술 아카데미에 합격하여 화가의 길을 걸었더라면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5년 반 동안의 비엔나 생활은 사람들과의 고립과 노숙 걸식등으로 건강은 악화되었고 살아남기 위한 냉혹한 투쟁이었다.
<비엔나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은 나의 생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교훈을 심어주었다/나의 투쟁/히틀러>

그의 말대로 비엔나에서의 떠돌이 생활은 10년 후 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가난하고 불만에 가득 찬 처지에 처한 독일 국민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공감된 연설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히틀러/가운데

당시 오스테리아에서는 오랜 역사를 가진 종족 이론 즉 금발에 갈색 눈을 가진 아리안이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타고난 최상위 민족이며 집시족 슬라브족 특히 유태족이 혼인 등으로 독일인의 피를 더럽히는 하위 민족으로 분류되었다.

더욱이 유태인들이 언론을 독점하고 주식시장을 포함한 대다수의 자본을 소유하여 본인들의 빈곤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피해 의식 그리고 맥주집 술안주에 불과한 유태인의 세계 지배 음모설을 굳게 믿어 유태인에 대한 히틀리의 광적인 협오가 스무 살 청년의 뇌를 독버섯처럼 잠식해갔다.

<나는 믿는다 내가 전능하신 창조주의 의지대로 행위함을... 유태인을 전멸시키는 것이 곧 창조주의 작업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히틀러>

친구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장래에 걸어볼 기대조차 없는 비엔나의 고독한 젊은이는 정치에 점점 관심을 가졌으며 고만고만한 또래의 젊은이들이 모이는 독서 클럽에서 정치 토론에 몰두했고 이 과정에서 훗날 제3제국을 영도해 나가는데 필요한 온갖 왜곡된 정치 신념들을 축척하게 된다.

그는 독서광이었고 여과 없이 잃은 책들이 그의 길지 않은 학력에 지적인 보완 도구가 되었던 것 같다.
이때 술도 담배도 여자에도 관심이 없던
히틀러가 유일하게 몰입한 것은 바그너의 오페라였는데 이는 바그너의 웅장하고 감상적인 오페라에서 극화된 독일과 독일인에 대한 영광 때문 이었다.
독일의 웅장한 부활, 그 화려한 상상이 비참한 그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그날을 고대하고 고대했다.

그 당시 히틀러는 듣는 사람이 누구이든 관계치 않고 독일의 영광된 운명과 유태인과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 열변을 토했다.

히틀러를 히틀러로 있게 한 것은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난 그의 웅변술에 있었다.
거울을 보고 연습한 다양하고 시의적절한 제스처에 맞춰 논리적이지도 지적이지도 않았지만
웅장한 음악처럼 청중을 감싸고도는 그의 열정적인 목소리가 도이치 민족의 부활과 유태인에 대한 증오를 부르짖을 때 청중들은 전율하며 흐느끼기
까지 했다.
선동적인 그의 웅변술은 가장 큰 무기요 자산이었다.

세상에 대한 불만과 증오로 가득 찬 23 세살 청년은
마침내 오스테리아의 징집 명령을 피해 독일 국경을 넘는다.

<독일 국경을 가로 지르는 뮌헨이 더 없이 나의 마음을 끌었다. 그곳에는 보다 진보된 예술적 삶과 보다 좋은 직업을 택할 수 있는 희망이 엿보였다 /나의 투쟁/히틀러>

히틀러가 모국 오스테리아보다 독일을 선택한 것은 같은 인종이며 중세 도이치, 신성 로마제국의 같은 울타리 안에 있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그너의 오페라가 보여준 과장되고 환상적인 독일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독일 오스테리아는 합쳐져서 위대한 어머니
도이치 국가로 돌아가야 한다/나의 투쟁>
그리고 1차 내전이 발발한 25세 때 그는 독일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뮌헨에서의 삶 역시 비엔나에서의 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1914년 6월 히틀러가 25세 때 발발한 1차 세계 대전을 히틀러만큼 환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전쟁이 세상과 그를 억눌렀던 사회질서를 뒤집고 자신을 실패와 좌절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던 것이다.

< 미칠 듯한 기쁨을 참지 못해 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나에게 생명을 주신 선한 하느님께 충심으로 감사했다/나의 투쟁 >

그는 주저 없이 독일군에 지원 입대했고 뛰어난 군인으로 여섯 번의 훈장을 받았으나
독일의 패배로 전쟁은 끝이 났다.

바깥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던
히틀러는 계속 군에 머물렀고 군인의 신분으로 <독일 노동자 단체>라는 모임을 정탐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우연히 행하게 된 정열적인 연설에 매료된  단체장으로부터 단체의 가입을 권유받는다.
정치적 행보의 첫 걸음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 이제 우리는 대단한 입을 가진 오스테리아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독일 노동자 단체의 창설자/ 히틀러에 대해 언급하면서 >

이후 히틀러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다.
노동자 단체의 집회를 주도하며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웅변술로 자신의 좌절감과 분노를 독일 국민 전체의 고통으로 확산시켰다.
분노의 열변이 사회 전체의 여론을 장악하며 히틀러의 단체는 정치적 단체로 급 성장하였고 <나치당>으로 개명하며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급부상한다.

괴링, 헤스, 림 등 정신병적인 인물 들이 당에 합류하고 스바스티카의 문양을 직접 디자인하며 고대 로마 군단의 경례 방식을 모방하여 팔을 쭉 뻗 나치식 경례를 채택한다.


퇴역 군인들을 주축으로 어느 정도 무력적 기반까지 갖춘 히틀러는 무능한 주정부를 쓸어버리고 국가 재건을 위한 폭동을 모의한다.
하지만 허술한 준비로 맥주 잔속의 폭풍으로 끝나버린 뮌헨 폭동(맥주 홀의 봉기)으로 8개월간 복역하게 되나 자서전 <나의 투쟁>의 집필과 더불어 오히려 히틀러의 존재를 부각하는 사건이 된다.

위대한 독일의 재건, 패전의 배상 조건인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 유태인의 인종청소 등 일관되고 확신과 열의에 찬 히틀러의 선동적 열변에 매료된 군중의 지지는 나치당을 제2당으로 끌어올리며 그를 단 시일 내 독일의 수상 그리고 총통 Fuhrer이라는 호칭을 만들어낸다.


선동과 증오와 비합리의 국민 대변자.
< 총통이 곧 당이요, 당이 곧 총통이다/히틀러 >
< 한 마리의 개가 위대한 조국 독일을 이끌고 있다/ 벡크, 히틀러에 대한 언급>
<궁극적 목적은 전 유태인의 몰살이다. 이는 강력한 정부하에서만 가능하다/히틀러>

총리가 된 지 3년 만에 히틀러는 괄목할만한 개혁적 성공을 이루어낸다.
무역과 자본 흐름의 통제, GM IBM 같은 미국 기업의 유치, 노조의 자주성 파괴 등의 기본 정책 아 실업자는 줄고 국가 수입과 생산력은 배가되었다.
독일의 부흥은 미국에서와 같이 대규모의 공공사업에서 비롯되었는데 아우토반의 건설은 폭스바겐 같은 자동차 산업을 발달시켰고 자동차 산업은 많은 일자리를 창출했다.

경제 복구를 위한 히틀러의 계획이 성공하자 그의 지위는 난공불락이 되었고 인기는 더 할 나위 없이 치솟았다.
그는 모든 당을 무력과 협박으로 해체하고 오직 하나의 당 그만이 통치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그는 독일이 위기에 처했을 때 늘 나타나는 위대한 영웅이다/히믈러>

전편을 통하여 반복되는 그의 주제는 위대한 독일 제국에 대한 꿈이요 독일어를 사용하는 모든 국가의 초 국가적 통일 그리고 종족 이론에 집중되었다.
1935년 45세 때 히틀러는 육군과 공군의 군비 증강을 위하여 징병제도를 실시했으며
강력해진 군사력을 바탕으로 회유와 협박으로
피 한방을 흘리지 않은 채 오스테리아와 체코슬라비키야라는 국가명을 유럽 지도에서 지워버린다.

독일이 급 성장한 반면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맞붙기에는 너무 위축되어 있었 세계는 히틀러가 유럽의 땅덩이를 조금씩 삼켜가는 것 지켜보면서도 그저 방관만 하고 있을 따름 이었다.
이젠 히틀러는 중세에 설립된 최초의 도이치, 제 1 제국 신성 로마 제국(844년간 지속), 제2제국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의 제국(47년간 지속 )에 이어 천년의 지속을 예언하며 본격적으로 제3제국의 시작을 선언했다.

나치의 대규모 집회에는 매번 수십만의 군중이 몰려들었고 군중들은 과장되고 화려한 무대장치로 인해 거의 미친듯한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 들었다.

히틀러는 자신을 신격화하는데 있어 건축물이나 기둥, 현란한 깃발 장식, 화려한 조명등 대중심리를 이용하는 데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리고 모든 생산력은 지속적으로 군사력 증강
이라는 하나의 목표에 집중했다.
< 우리는 버터 없이 살 수 있다. 그러나 총 없이는 결코 살수가 없다./괴벨스 >

이런 야욕에도 불구하고 연합국들은 히틀러를
찰리 채플린의 콧수염을 흉내 내는 작은 선동가  정도로 비하했으며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만만한 인물로 방관하고 있었다.

1939년 독일은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 체결 후 전격전으로 폴란드를 침공해 나간다.
< 진군 후의 48시간은 내 생애에 있어 가장 신경을 곤두세운 시간이었다. 오, 주여! 모든 일이 잘 풀렸고 나는 기쁨에 충만하였나이다. 세계는 용기 있는 사람의 것이고 히느님은 그를 돕는다/히틀러>



곧이어 히틀러의 예상대로 프랑스와 영국의 선전포고와 함께 제 2차 세계 대전은 시작된다.

폴란드 침공
전쟁에 참전하는 아버지를 배웅하는 가족
유럽을 짋 발다

폴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프랑스, 루마니아, 볼리비아, 헝가리 등 전유럽이 차례차례로 스바스티카의 문양으로 뒤 덮였고 오직 영국만이 독일에 대항하고 있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소. 다만 피와 노고와 눈물 그리고  땀뿐이오/ 처어칠 영국 수상>


이 와중에 1945년 1월 27일 폴란드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가스실, 시체로 만든 비누, 머리 카락 슬리퍼 등 처참한 악행을 남기며 600만 명에 이르는 유태인이 인종  청소라는 미명 아래  학살되었고 인간의 폭력성, 잔인성, 배타성 광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아우슈비츠

승리감에 도취된 히틀러는 종족 이론에 따라 제거되어야 할 또 하나의 대상 슬라브 민족의 땅으로 진군을 시작한다.
소련 침공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이 되리라는 것은 히틀러가 이미 나의 투쟁에서 개략적으로 그려놓은 필연적 목표였으며 가장 큰 도박이었다.
<나는 이전에 한 번도 들어가 볼 적이 없는 어두운 방의 문을 밀치고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히틀러/소련 침공 직후>
폭격기와 탱크를 앞세운 전격적으로 6주면 끝나리라고 생각했던 소련 침공은 혹한에 대한 무 방비와 엔진과 총구가 얼어붙는 한파 속에서 16만 명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멸(동사) 하는 대 참패를 격는다

소련 침공
동 장군에게 발목을 잡히다
전멸


곧 이은 스탈린의 반격, 진주만 공습, 미국의  개입으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롬멜 군단의 침몰, 추축국 이탈리아의 항복,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히틀러의 패색이 짙어지며 천년을 예언했던 제3제국의 꿈은 대 재앙을 남기고 건설 12년 만에 막을 내린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나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충성은 사라졌고 명예도 땅에 떨어졌으며 온통 좌절과 배신 뿐이다.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히틀러 '45년 4월 29일/56세  권총 자살 직전의 연설>
이날 히틀러는 오랜 연인 에바와의 결혼식, 유언, 차기 총리 지명 등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살한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히틀러의 광기에도 불구하고  사병에서부터 장군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반항한 사람은 거의

없으며 히틀러의 명령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고 힘 닿는 데까지 명령을 수행했다.
국민들 역시 군대만큼 충실하게 그를 따랐다.

독일 국민들은 이 작고 괴상하게 생긴 오스테리아인에게 얼마나 매혹되었던지 그에 대한 반항보다는 죽음의 길을 기꺼이 선택했다.
당시 독일인들에게 있어 히틀러는 분명 유능한 지도자였을 것이다.
<유능한 지도자는 대중의 감정과 능력을 자신의 목적에 적합하도록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제임스/미국 철학자>

그러나 지도자가 권력을 타 종족의 지배, 전체주의적 혁명의 조장, 특권, 권력 유지 및 확장에 둔다면 인권과 인간성의 양양이라는 지도력의 근본 취지를 벗어나
파국에 이르다는 것 또한 역사의 인과응보이다.

히틀러에게 환호하는 독일 국민들


한편 히틀러의 온갖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치적 역량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시선도 있다.
<한 남자가 기적을 일으켰다. 강력한 카리스마와 흡인력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해 초지일관하는 자세, 강철 같은 의지 그리고 담대한 마음을 가진 그는 타고난 국민의 지도자이다/1936 년 영국 Daily Express사설>
또한 독일의 연이은 사죄에도 불구하고
<도로망과 실업률 제로 정책 낮은 범죄율, 민족주의 등을 내세운 나치즘에 긍정적인가>라는 2007년 독일 Stern Magazine의 설문 조사에서 25% 의 독일인이 그렇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를 부분적, 소극적으로 이해하려 해도 야욕이 빚어낸 7천3백만 명에 이르는 전쟁 희생자와 <홀로코스트>라는 한 단어만으로도 그를 끝 간데 없는 악인외는 달리 평가할 방법이 없다.

나치스의 화려한 외형 속에는 일인에 의존하는 극도의 비효율적 조직이 있었고 법에 의한 지배가 아닌 모호한 이념에 의한 통제가 조직을 병들게 했으며,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 안정을 위해서 독재를 스스로 허용한 독일 국민들에게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20대의 정제되지 않은 지식과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부작용을 일으키는지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시간은 끊임없이 흘렀고
수 없이 널린 전장의 시체는 안치되었으며
유린된 땅들은 모두 회복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의 삶과 행위는 인류 역사상 엄청난 변환이며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군국주의, 국가주의 그리고 근거 없는 증오로 인한 종족 집단 학살, 살인적 폭정이 베를린의 함락과 함께 영원히 매장되었을까

유럽의 심장에 경련을 일으킨 광란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의 모습은 지도자의 어두운 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표본이며
어떠한 어둠도 역사의 조명을 받아 심판을 피할 수는 없음을 잘 보여준다.

원폭투하1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사죄 없는 일본의 재무장, 중국의 부상, 영원한 철의 장막 러시아, 미국의 모호한 선악 기준과 독주, 유럽 공동체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는  것일까?
* 나의 투쟁/히틀러
* 히틀러 /데니스 웨프먼 & 이서슐레진저
* HowTo Read 히틀러/닐 그 레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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