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_01_美山里 大開仁洞 1번지

오늘 구름이 북동쪽으로 흐른다. 이런 날, 어떤 사람의 마음은 ...

by 김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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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 가득 과꽃이 피었다. 가을이어서 햇빛은 눈물겹도록 맑다.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미산리 대개인동 1번지. 해발 고도 8백 미터 산골 분지에 어쩌면 이리도 예쁜 꽃밭이 있는가. 새파란 하늘을 머리에 인 개인산 봉우리들도 그 수려한 이마를 숙이고 꽃밭을 굽어본다. 사람이 꽃을 예뻐하듯이 산은 제 품에서 사는 짐승들과 사람을 어여삐 여긴다.


대개인동 1번지에 사는 주민 차 씨는 1983년 가을에 대개인동에 들어왔다. 혼자였다. 전남 곡성이 고향인 그는 군에서 전역하고 서울에서 살다가 병을 얻었다. 그 병이 깊어져 공기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요양하다가 개인산 개인약수가 영험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내면 청도리 통마름이라는 데서 요양하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여기 이야기를 해요. 솔깃하더군요. 인연이 닿으려고 그랬는지 그 길로 여길 와 봤는데 과연 첫눈에 저를 살려줄 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팔려고 내놓은 집이 있어서 바로 계약했지요.”


차 씨가 산 집은 1971년부터 1979년까지 9년 동안 산판을 할 때 인부들이 살던 ‘함바(밥집)’였다. 미산리에서 파리목을 넘어 차 씨 집 앞까지 6킬로미터에 달하는 좁고 가파른 도로도 그때 낸 산판 길이다.


“워낙 깊은 산중이라 처음에는 적적했어요. 자주 마을에 내려가 놀았지요. 사람이 그리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러던 참에 어머니가 다니러 오셨어요. 며칠 묵어 보시고는 아주 눌러살겠다고 하셔요. 형제들이 펄쩍 뛰며 말리는 데도 막무가내로 여기가 좋다는 거예요.”


마루에 앉아 콩을 까고 있던 차 씨 모친이 듣고 있다가 손을 내저으며 한마디 거든다.


“이젠 서울 가서 못 살아. 먼저도 한 번 갔다가 시끄럽고 복잡해서 혼났어. 한시바삐 돌아올 생각만 나더라고.”


차 씨 모친이 까고 있는 콩은 뒤꼍에서 딴 담콩. 콩알이 보석보다 더 탐스럽다. 차 씨 모친은 ‘시장은 어디로 가서 보느냐’는 질문에 ‘밭으로’라고 아주 간단하게 대답한다. 쌀만 현리에 나가 트럭으로 사들이고 나머지 부식은 모두 텃밭에서 재배한 채소와 달걀 등으로 해결한다는 이야기다.

개인산의 덕을 톡톡히 보는 사람은 차 씨 가족들만이 아니다. 방이 10개나 되는 차 씨 집에서 기거하며 약수터를 오르내리는 수객(水客)들도 한결같이 개인산의 덕을 칭송한다. 수객이란 본래 사공이나 뱃길 가는 나그네를 말하지만, 구명도생하려고 약수를 찾아 나선 나그네를 일컫기도 한다.


이곳의 최고령 수객은 김만복(69세) 씨. 서울시 은평구 역촌동에 살다가 당뇨에 백내장까지 겹쳐 1984년에 두 아들의 부축을 받고서 간신히 입산한 그는 요즘 들어 산으로 약초를 캐러 다닐 만큼 건강해졌다.


역시 서울에서 살다가 당뇨 합병증으로 심한 신경통이 와서 문지방도 못 넘었다는 이재명(53세) 씨도 1985년 9월에 입산, 이듬해부터 회복되어 약초나 버섯을 캐러 다닌다.


“건강 찾았는데 뭘 더 바라겠어요. 애들도 이젠 다 컸으니 여기서 그냥 여생을 보내렵니다.”


“죽기는 면했지요. 피로해서 일도 못 했는데 ……. 저거 보슈. 내가 산에서 해 온 떡다리 버섯 아닙니까. 요즘 영지버섯이 귀해지니까 저것도 없어서 못 팔아요.”


모두 이구동성으로 구명도생했다는 이야기다. 개인산에서 사람이 구명도생한 역사는 1891년에 함경북도 출신의 지덕삼이라는 포수가 대개인동 골짜기에서 탄산약수를 발견하면서부터다. 한 입 건너 두 입, 두 입 건너 네 입으로 개인산 약수가 영험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수객들이 모여들었다.


개중에는 의원도 두 손 든 난치병 환자, 의원이고 뭐고 약 한 첩 지어먹을 형편도 못 되는 가난뱅이 환자가 반송장으로 남의 등에 업혀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제 발로 씩씩하게 걸어서 나갔다. 믿어지지 않지만, 걸어서 나간 사람 중에는 ‘앉은뱅이’도 있었다 한다. 또 ‘벙어리’가 약수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 물을 떠먹는 중에 ‘나도 좀 먹게 비키라’고 하자 ‘아 좀 기다려’하며 말문이 터졌다고도 한다.


약수는 차 씨 집 뒤 대개인동 골짜기 안에 있다. 10년 전에 이미 산판이 끝난 탓에 무너져 내린 산판 길을 따라 2 킬로미터쯤 오르면 전나무 숲이 있는 조그만 분지가 나타난다. 그리고 수객들이 쌓은 돌탑들이 보인다. 환자는 무병장수를 빌고, 심마니는 삼을 빌고, 애 못난 아낙은 자식을 빌면서 쌓아 올린 그 무수한 돌탑들은 소박하면서도 신비스럽다.


약수가 샘솟는 암반 위에는 용케도 산판을 피한 아름드리 전나무가 몇 그루 서 있다. 거기 산신당도 있다. 지붕은 없고 그저 넓적한 돌담으로 제단을 만든 산신당이다. 약수를 한 모금 마시고 산신당에 올라서면 바람 소리 물소리가 적막을 강조한다. 거기서 바라보는 산봉우리들은 그저 앞산 뒷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산신령 그 자체이다.


특별한 신심을 갖지 않은 사람도 이곳에 이르면 약수라도 길어 산신당에 바치고 절하게 된다. 그리고 안심(安心)한다. 그것은 이 산골이 이미 하나의 숭엄한 종교를 이루고 있음을 말해 준다. 옛사람이 어떤 산을 일러 ‘미산(美山)’이니 ‘개인산(開仁山)’이니 하고 문자를 써서 부를 때는 단순히 그 자태만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그것 말고도 사람을 이롭게 하는 구석이 많아야만 ‘아름답다’ ‘너그럽다’고 칭송한다.

육구만달과 오구쌍대


개인산은 병든 수객만을 살려 준 것이 아니다. 찾아드는 사람들 모두에게 고루 덕을 베풀었다. 난리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 역적이 되어 쫓기는 사람들, 남의 원한을 산 사람들, 도망친 노비, 땅을 뺏긴 농민, 염세주의자, 광인들도 이 산에 들어와 새 삶을 도모했다.


지금은 비록 다 쓰러져 가는 빈 너와집 한 채와 차 씨네 집만 남았지만,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했던, 이른바 ‘대동아전쟁’ 때만 해도 대개인동에는 가옥이 70여 호나 있었다고 한다. 차 씨 집 뒤꼍에 모둠을 짓고 산삼을 찾아다니는 심마니 전성근(全成根:56세)씨도 해방 전에 대개인동에 들어와 몇 해를 보냈다고 한다.


전 씨는 13세 되던 해인 1944년 겨울에 입산, 약수터에 있던 용왕사라는 절을 지켜 주면서 겨울을 났다. 당시만 해도 길이 없어서 눈이 오면 수객들의 발길이 끊어지므로 용왕사 보살 할머니도 겨울이 되면 마을에 내려가 겨울을 나고 봄에 올라왔다. 그래서 전 씨가 쌀 두 가마를 받고 겨울 동안 혼자 절을 지켰다고 한다.


전 씨는 그 이듬해 황영덕이라는 심마니를 만나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작은 마니가 됐다. 그리고 얼마 후 일산 모둠이라는 곳에서 작은 무 크기의 산삼을 캐는 걸 보았다고 한다.


일산 모둠은 개인산 구룡덕봉(1,388미터)에서 점석봉(1,324미터)에 이르는 능선에 있는데, 거기서 캔 산삼이 꼭 일산(日傘)처럼 생겼다고 해서 일산 모둠이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했다. 어인 마니 황영덕 씨를 비롯한 전 씨 일행은 일산 모둠에서(당시는 아직 일산 모둠이라는 지명이 붙기 전이다) 감자밥이나 옥수수밥을 겨우 해 먹으면서 삼을 보러 다니고 있었다. 쌀밥 먹을 형편이 못 되었다.


밥 짓는 솥을 안친 자리 옆에 너삼(콩과에 속하는 다년생 초본식물로 음력 3월에 채취하여 약재로 씀) 대가 자라고 있었다. 황영덕 씨는 밥때마다 숟가락으로 그 너삼 대를 툭툭 치면서 염불 하듯 ‘이게 삼이면, 이게 삼이라면 평생 흰쌀밥에 고기반찬 먹고 살 텐데......’하고 탄식했다.


그렇게 닷새가 지난 어느 날, 40세가량의 사내가 조그만 보퉁이 하나를 들고 올라왔다. 제천에서 왔다는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은 전 씨 일행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마니 님들, 여기서 뭘 못 보셨습니까?”


“우리는 뭐 본 게 없습니다.”


“그럼 마니 님들 내가 여기서 재물을 잡아도 딴말 마십시오.”


“그럽시다.”


“자, 그럼 잡습니다.”


사내는 이마의 땀을 손으로 한 번 쓱 훔치고는 작대기를 들고 일어서더니 솥 앉힌 자리 옆의 너삼대, 황영덕이 밥때마다 숟가락으로 툭툭 치며 탄식하던 그 너삼대를 탁 쳤다. 그러자 갑자기 황영덕이 땅을 치면서 ‘어이쿠’하고 소리를 질렀다. 너삼인 줄만 알았던 그 식물이 바로 산삼이었다.

전 씨 말에 의하면 산삼은 둔갑한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그저 흔한 너삼으로, 또 어떤 사람의 눈에는 도라지나 작약으로도 보인다. 오직 삼을 캘 인연이 있는 사람의 눈에만 제 모습을 보인다.


작은 무만 한 일산 모양의 동자삼을 캔 제천 사람은 가지고 온 조그만 보퉁이 속에서 쌀과 소주를 꺼내 노구솥에 메(밥)를 지어 산신령에게 올렸다. 제가 끝난 뒤 밥과 소주를 전 씨 일행에게 나누어 주는데 밥은 아무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밥이 먹히겠어요? 오랜만에 보는 흰밥인데도 다들 쓴 소주만 한 잔씩 마셨어요. 그때 소주가 범표 소주인데 내가 그때부터 그 범표 소주로 술을 배웠습니다.”


훗날, 그러니까 40세 무렵에 전 씨는 향로봉 쪽에서 한꺼번에 육구만달과 오구쌍대를 각각 한 뿌리씩 캤다고 한다.


“국수 세 관을 지고 올라갔는데, 비를 만나서 맨 날 모둠 속에서 국수만 먹고 있다가 하루는 꿈을 꿨어요. 밑동만 남은 고목 둥치에 암탉이 병아리를 품고 앉았는데, 암탉 위에 또 한 마리 하얀 닭이 앉아 있어요. 내가 그놈들을 한 손에 한 마리씩 잡아들고 산을 내려고 왔어요. 심상치 않은 꿈이지요. 그 이튿날 산을 세 잔등을 에돌고 두 구렁을 건넜는데 보니 작약밭이 있어요. 꽃이 아주 새빨갛게 핀 것이 굉장하더라고요. 그중 제일 큰 놈을 파는데 흑저구들이 내 머리 위로 새카맣게 몰려서는 법석을 떨어요. 어떤 놈은 나뭇가지를 물어 내던지는데 정신이 없더라고요.”


흑저구라는 심마니들의 은어는 까마귀를 뜻한다. 산삼을 캘 때는 보통 이런 이상한 일이 있다고 한다.

“이상했어요. 흑저구들이 보채는 통에 정신이 없어서 작약이라고 캐놨는데, 아, 이게 잘 보니까 삼 같아요. 그때 마침 뒤에 처져서 오던 아저씨가 도착했기에 그걸 내보이며 물었어요. ‘이거 좀 보슈, 이게 삼이요 작약이요?’ 그랬더니 아저씨가 ‘예끼 이눔아 그게 바로 삼이다’하는 거예요.”


병아리 품은 어미 닭 위에 흰 닭이 앉은 꿈에서처럼 오구쌍대 밑에 육구만달이 또 박혀 있었다. 두 뿌리 합친 무게가 석 냥 두 돈. 쌀 한 가마에 5천 원쯤 하던 그때에 1천8백만 원에 팔렸다. 서울 목동에 24 평짜리 기와집 네 채를 사고도 남아서 경기도 양평에 논 22마지기를 더 샀다. 그러나 지금 전 씨에게 남은 재산은 인천시 부평구 부개동에 있는 아파트 한 채뿐이다.


4남 2녀를 공부시켜 시집 장가보내고 빈털터리가 된 전 씨가 개인산에 다시 들어온 것은 3년 전, 그때부터 매년 6개월 이상을 개인산에서 보내면서 마지막으로 한 뿌리만 더 캐게 해달라고 산산령에게 치성을 드리고 있다.


국립지리원 발행 5만 분의 1 현리(縣理) 지형도를 펼치면 개인산을 감싸고 있는 내린천이 꿈틀거린다. 살풀이춤의 명인이 춤의 절정에서 허공에 흩뿌린 순간의 명주 띠가 이룬 선이 이 내린천의 흐름을 닮았다.


정감록 등 비기(秘記)에 전하는 문자 궁궁을을(弓弓乙乙)의 형국이 바로 이 흐름이며, 모태와 태아를 잇는 탯줄도 이 흐름이다. 그리하여 이 흐름이 감싸고 있는 개인산은 마침내 생명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생명의 젖을 주는 산, 산삼을 점지해 주는 산, 결국 생명을 주는 산이 개인산이다. 개인산은 사슴이나 산돼지 노루뿐만 아니라 열목어(熱目魚)라는 어류에게도 생명을 나누어 주고 있다.


열목어는 그 이름처럼 눈에 열이 나서 아주 차가운 물, 아주 깨끗한 물에만 살 수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옛날 우리 산천 곳곳에는 이 열목어들이 많이 살았으나 하천 오염이 심각해진 오늘날에 와서 열목어들의 서식지는 이곳 내린천 일대로 한정되고 말았다.


대개인동의 차건일 씨 가족과 수객들, 그리고 심마니 전성근 씨는 바로 이 열목어를 닮은 사람들이다. 저 혼탁하고 미지근한 물이 맴도는 한강에서 열목어가 살 수 없듯, 처절하고도 살벌한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그 강변에서는 이 사람들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오늘 구름이 북동쪽으로 흐른다. 이런 날, 어떤 사람의 마음은 구름을 훨씬 앞질러 간다. 산도 훌쩍 넘고, 물도 후다닥 건너서 곧장 가 닿는 곳, 거기 개인산 봉우리들이 그 수려한 이마를 숙이고 있다. 대개인동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굽어 보고 있는 것이다. (1989년)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