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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야 Dec 17. 2020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불평불만 말고... 일어나!

-365 매일 읽는 긍정의 한 줄-

나쁜 운에 대처하는 방법
Has fortune dealt you some bad cards?
Then let wisdom make you a good gamester.

운명이 당신에게 운 없는 카드를 돌렸는가?
지혜가 당신으로 하여금 훌륭한 노름꾼이 되게 하라.
-프랜시스 퀼스 Francis Quarles-


'안 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


잘 걷다가 나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는가?

운명이 당신에게 운 없는 카드를 돌려대서 '안 되는 놈'이 된 적이 있는가?

안 되는 놈이 막상 자신이 되었을 때 어떻게 대처를 했었는지, 아니면 만약 자신이 '안 되는 놈'이 되었다면 어떻게 대처를 할 텐가?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보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중요하다.'  
-앙리 루소-


그림이라곤 1도모르지만, 불운이란 단어를 떠올리니 화가 '앙리 루소'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화가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는 프랑스 북서부 라발이란 마을에서 배관일을 하는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유했던 그의 집안에 불운이 들이닥친다. 빚쟁이들에게 집이 넘어가고 오갈 데 없는 루소는 숙식제공을 받는 대신 일을 해야 하는 기숙사 학교를 다녔지만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만다. 학교 중퇴 후 회사에 급사로 취직을 하게 된 루소는 돈(20프랑)을 훔쳤다고 고소를 당하게 된다. 죄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루소는 군대에 자원입대를 했고, 군 복무 중 '죄가 확정'되어 1개월 감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365매일읽는긍정의한줄,린다피콘:책이있는풍경)


7년 예정이었던 군 복무 중 5년 차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루소는 군대를 제대한 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잠깐의 집행관 보조 일과 그가 전업화가가 되기 전까지 20여 년을  세관원으로 일을 하게 된다. 앙리 루소의 별칭이 '르 두아니에(Le Douanier:세관원)로 불린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루소는 세관원으로 일하는 동안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그림을 그린다. 전업화가가 아닌 아마추어 화가로 그림을 그리면서 루소는 '앵데팡당전(Independent)'에 평생 딱 2번을 빼고는 매년 작품을 전시했다고 한다.


틈틈이 그림을 그리던 아마추어 작가 루소는 22년간 다니던 세관을 그만두고 전업화가로 나선다. 그가 아마추어이던 프로던 간에 그의 작품은 조롱과 웃음거리일 뿐이었다. 특히 세관원으로 일을 할 당시에는 일요일에만 그림에 전념했기 때문에 그를 조롱하는 화가들은 그를 보고 '일요화가'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일하면서 무슨 그림을 그리냐,  철학가 '루소'와 구별을 해야지'라는 의도에서 붙여진 두 개의 별명, '일요화가', 르두아니에'가 그것이다.


참, 인간들 못됐다. 예나 지금이나 덜떨어진 인간들 하는 짓은 뭐 비스끄리 하다.



(굶주린사자가 영양을 덮치다:1905년.사진:지식백과)



'자연이 스승'이라는 루소는 정규 미술교육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기에 세관원 시절 시간이 날 때마다 시민 식물원, 자연 박물관, 동물원을 찾았고 그곳에서 접한 자연에 상상을 더해 그리고 또 그린 것이다. 심지어 백화점에서 나눠준 팸플릿 속의 동물을 보고 그렸다니... 루소가 아프리카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도 '만국박람회'때 인상 깊게 본 아프리카 마을에서 얻은 영감 덕분이라고 한다. 아프리카는커녕 평생 파리를 단 한 번도 떠나 본 적 없는 가난한 화가 앙리 루소. 49세의 늦은 나이에 전업화가로 나섰지만 루소는 생활이 점점 힘들어지자 음악과 그림 과외 등 여러 일을  부업으로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가난한 화가 루소의 가정사는 가난만큼 녹록지 않았다. 25살에 열 살이나 어린 아내 사이에 일곱 명이나 자식을 두었지만 다섯 명이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아니 어쩌면 그런 고통들로 그는 그림에 전념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이들의 죽음에 이어 아내마저 3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아내를 잃고 10년을 홀로 지낸 루소는 55세에 재혼을 했지만 두 번째 아내도 4년 만에 루소의 곁을 떠난다. 에휴...



(나,초상ㅡ풍경:1890.사진: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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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화가로 나선 이후에도 그의 그림은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유독 루소 자신만은 그의 그림을 인정하고 자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의 자신감은 드디어 인연을 만난다. 그의 작품에서 순수함과 독특한 원시의 힘을 읽어낸 화가, 피카소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피카소는 루소가 유명해지기 전 그의 작품을 수집하였고, 유명화가들을 초대하여 '앙리 루소를 위한 파티'를 열었을 정도로 루소의 작품에 애정을 보였다. 피카소가 마련한 파티에서 루소는 당당하게 자신을 어필했다고 한다.


"우리 둘 다 이 시대의 위대한 화가입니다.
다만 선생은 이집트 양식에서, 나는 현대적 양식에서."


피카소를 비롯한 유명화가들이 루소를 인정하면서 그의 작품은 빛을 보기 시작했고...

루소는 그가 죽기 1년 전, 1910년에 출품한 작품 '꿈'으로 많은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게 된다.


불운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그려낸 앙리 루소.
비록 말년이지만 수십 년간 그를 향한 조롱을 평정한 의지의 화가.
남의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한 사람.


부유했던 집안의 몰락으로 인한 학교 중퇴, 연속된 가난, 아이들과 두 아내의 죽음...

살면서 한 번도 만나기 힘든 기가 막힌 일을 겪은 가난한 화가가 말년에 환하게 웃기까지

그 과정에는 루소의 의지가 있었다.


아무리 운이 좋은 사람도 살면서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된다. 멀쩡히 걷다가 넘어질 수 있단 말이다.

나는 잘 걷고 있는데 재수 없게 조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어떤 놈이 나 넘어지라고 돌부리를 박아놨냐, 왜 하필 나야'라며 원망해봤자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아주 단순한 원리를 명심해야 한다.


넘어졌을 때 길은 하나다. 일어나는 것. 일어나지 않으면... 주저앉을 수밖에.

언제든 만날 수 있는 나쁜 운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넘어졌다고...

불평하고 원망할 시간에 얼른 벌떡 일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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