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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태섭 Mar 13. 2018

<황금의 샘>, <보이지 않는 세계> 등

'책보다 더 재미있다' 금태섭의 <금씨책방> 9 - 황금의 샘 등

<황금의 샘>

- 대니얼 예긴 지음, 김태유, 허은녕 옮김, 라의눈


사람들이 석유를 처음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던 때(고래기름을 대신해서 등유를 램프의 원료로 썼다)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석유 산업을 둘러싼 정말 많은 정보와 사연을 담고 있는 책. 많은 분들이 추천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안한 말이지만, 저자에게 '이야기꾼'으로서의 재주는 정말 안쓰러울 정도로 없는 것 같다.

소재는 풍부하다. 예를 들어 지금 아제르바이젠의 수도인 바쿠에서 1870년대 석유 산업에 뛰어든 것은 노벨상과 다이너마이트로 유명한 알프레드 노벨의 형들. 형제들이 여러 나라에서 몰려온 광부들에게 어떤 회사보다 나은 대우를 해줘서 직원들이 스스로를 '노벨 가족'이라고 부를 정도로 자부심도 높았는데, 약 30년 후인 1907년 볼셰비키들은 다름 아닌 스탈린을 바쿠로 보내서 '석유산업 경영자에 대한 끝없는 불신'을 선동하게 했고, 스탈린은 바로 여기에서 혁명과 음모의 기술, 야망과 냉소를 갈고 닦았다고 하는데.

(스탈린은 1920년대 볼셰비키 정권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석유산업의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켰던 3년 동안, 나는 실질적인 투사로서 그리고 지방 노동운동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많은 노동자 집단을 이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나는 바쿠에서 전투를 치르면서 두 번째 세례를 받았고, 거기서 비로소 완전한 혁명가가 될 수 있었다."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그런 얘기가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어서 재미를 느끼기가 어렵다.

록펠러가 스탠더드 오일을 만들어내고 경쟁자를 제거하는 과정은 진짜 관심이 있는데 구체적인 사례는 별로 없고 단지 "스탠더드 오일은 경쟁자의 몸과 마음을 꼼짝 못하게 옭아매는 낙지와 같은 존재였다."라는 식의 평가만 있다. 록펠러를 신랄하게 비판해서 '록펠러의 여자친구'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기자 얘기도 나오는데 그냥 그렇다는 얘기만 있을뿐 자세한 사정이 안 나온다. 왜 그런 건지가 알고 싶다구요!!

일 하는 틈틈이 책을 읽는 건데, 그러다보니 읽을 때마다 등장인물이 헷갈리고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디터딩이 누구더라?)

꼭 읽고 싶은 책이기는 하지만 한 이틀 정도 아무 일이 없을 때 집중해서 봐야 될 것 같다. 1,2권 합해서 1,200페이지가 넘는 책을 400페이지쯤 읽었는데 다시 처음부터 읽기로 하고 일단 눈물을 머금고 처박아 두기로.



<보이지 않는 세계>

- 리즈 무어 지음, 공경희 옮김, 소소의 책

이것도 또한 실망스러운 책. 인공지능과 암호 해독이 주요한 소재로 등장하는데 그냥 소재만 특이할 뿐 스토리는 진부하다.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율리 체 같은 작가들을 보면 양자역학이나 카오스 이론 등을 소재로 쓰면서 거기에서 파생되는 참신한 문제들을 등장시키는데,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경우 굳이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나 암호 해독이 없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을 듯.

아버지의 비밀을 딸이 추적하는 이야기인데 아버지는 자신의 과거를 암호를 이용해서 초기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입력을 해둔다. 그런데 일기장에다 써서 숨겨두었다고 한들 별로 다르지 않았을 내용. 비밀 자체도 많이 다루어진 것인데(동성애와 매커시즘 이야기) 깊이 있게 파고들지 못 했고. 가독성은 높지만 남는 것은 별로 없는 책.

<달콤한 노래>

-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아르떼

소품이지만 최근 읽은 소설 중 가장 빼어난 작품이 아닌가 싶다.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경위로 아이들을 죽이게 되는지(주인공은 유모인데 맡고 있던 아이들을 살해한다) 불친절할 정도로 설명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가 그대로 와닿는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서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하물며 타인의 삶을 잠깐잠깐 마주치는 장면들을 통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해설은 전혀 없이 이야기를 통해서 느끼게 해주는 책. 소설이 가져야 할 미덕을 매우 잘 보여주는 작품. 이런 식의 소설은 거의 못 본 것 같다. one of a kind.

<루시 골트 이야기>

- 윌리엄 트레버 지음, 정영목 옮김, 한겨레출판

옮긴이는 이 책에 대해서 ".... 운명과 시간이 한 개인의 삶에 조용히 작용하는 방식을 윌리엄 트레버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라는 평을 인용하고 있는데, 틀린 평은 아니지만, 그보다 이 책은 연애 소설로서 정말 뛰어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스케일이 작을 뿐 어딘가 "닥터 지바고"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있는데 특히 남녀 주인공의 결실 없는 사랑 부분이 그렇다.

"라하단을 떠나면 안 돼요." 그녀가 말했다. "<허영의 시장>"을 다 읽기 전에는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다 읽으면 우린 그 이야기를 해야 돼요. 그것도 시간이 꽤 걸릴
거예요."

이 대목이 얼마나 슬프던지. 

새커리의 "허영의 시장"은 중역의 의심이 매우 드는 번역서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번역이 없어서 못 읽고 있었는데 오래 전에 사놓고 처박아뒀던 원서를 꺼내볼까 고민 중.("허영의 시장"의 줄거리와 "루시 골트 이야기"에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오래 남는 소설을 읽고 싶은 분들께 강추.

어쨌든 이렇게 읽던 책들을 정리하고 내일부터는 새로 산 책들로.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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