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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태섭 Mar 13. 2018

<영원의 제로> 읽기

책보다 더 재미있다, 금태섭의 '금씨책방' 10 - 영원의 제로

아무런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다가 흥미로운 지점을 여러 곳 발견한 독서 체험.

저자인 햐쿠타 나오키는 아베 총리의 측근으로서 “난징대학살은 없었다.” “종군 위안부는 거짓말이다.” 등의 망언을 늘어놓은 전력이 있다. 올해 초 한반도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전투상태가 되면 재일(동포)은 적국의 사람이 되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짓눌러 죽일 수 있다.”라고 끔찍한 혐한 발언도 했다. 때문에 가미카제 특공대원을 소재로 한 이 책도 ‘극우소설’로 알려져 있다. 미처 읽지 않은 사람은 천황을 위해 산화한 가미카제를 일방적으로 찬양한 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작은 반전이 있다.

일단 저자는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서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의 길로 내몬 가미카제를 강하게 비판한다. 민항기를 납치해서 9.11 사태를 일으킨 테러리스트와 다를 게 없다는 말까지 한다. “일본은 광신적인 국가”였고, “국민 대부분이 군부에 세뇌되어 천황 폐하를 위해 죽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오히려 기뻐했”는데 그런 모습은 현대의 테러리스트와 똑같다는 것이다. 실제 전쟁에 참여했던 노인들은 가미카제 대원들이 테러리스트와 같은 정신 상태였다는 주장에는 반대하지만, 그들도 그 당시 일본 군부가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침략노선을 약화하고 군축으로 나아가려는 정부 수뇌부를 군부의 청년 장교들이 죽인” 5.15 사건을 군사 쿠데타라고 냉정하게 규정하면서, 당시 그들을 영웅으로 칭송한 언론의 태도, 그로 인한 주동자의 감형이 2.26 사건으로 이어졌다고 탄식한다. 이런 부분을 읽다보면 이 책은 결국 침략전쟁을 부정하는 소설로 읽히게 된다.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진 <영원의 제로>를 본 어떤 한국 네티즌은 “자막이 없이 봤을 때는 군국주의 영화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한글 자막이 달린 것을 보니까 반전영화였다.”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2차 대전 당시 참전국의 전투기를 디테일하게 비교하면서 일본의 “휴머니즘 결여”를 짐짓 꾸짖기도 한다. 일본의 전투기 제로센은 놀라운 항속거리와 선회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방어력은 형편없다. 조종사들은 낙하산도 제대로 장착하고 있지 않은데다가 방탄을 위한 장치가 없어서 적기의 총탄에 맞으면 살아남기 어렵다. 그에 비해서 미국의 그루먼 F6F는 조종석 뒤에 7.7밀리미터 기관단총으로는 뚫을 수 없는 두꺼운 방탄판을 마련해 놓았다. 불시착한 조종사를 구출하기 위해서 공습할 때는 항상 잠수함을 배치한다고도 한다. “미군은 탑승원의 생명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모른다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것이 일본 조종사로 참전한 등장인물의 고백이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에서 사관학교 출신들이 전투 경험도 별로 없이 군 지휘부를 차지하고 앉아서 젊은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았던 일을 준엄하게 야단치는 장면까지 보고나면, ‘아 이 책은 나름 합리적인 시각으로 쓴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반전소설(또는 영화)”이라는 네티즌의 평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소설에는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면이 몇 가지 있다.

우선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거의 인종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차별적인 시각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소설을 읽는 내내 개인의 뜻과 상관없이 전쟁에 휘말린 2차 대전 당시의 일본 병사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몇몇 대목에서는 눈물이 찔끔 나오게도 한다. 합리적(!)인 마음을 가진 작가의 시각은 적국이었던 미국 병사들에게까지 미친다. 격추된 미군기에서 낙하산으로 탈출하다가 죽은 미군 병사의 호주머니에서 가슴을 드러낸 여성의 사진이 발견된다. 낄낄대며 돌려보는 일본군 병사들에게서 사진을 뺏은 주인공은 뒤에 적힌 글귀를 보여준다. 그 사진은 전장에 나가는 병사의 아내가 부끄럽게 찍어서 선물로 준 것이다. 일본군들은 그 사진을 미군 병사의 호주머니에 넣어서 장례를 지내준다. 여기까지만 보면 지극히 휴머니즘적인 시각으로 보인다. 그러나 5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에서 일본인과 미국인 외에 소설의 무대인 아시아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평양의 섬들, 그리고 한반도의 원산도 잠깐 등장하는데 그곳에서 ‘남의 전쟁’에 휘말려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가미카제에 동원되기도 했던 사람들의 얘기는 전혀 없다. 작가인 햐쿠타 나오키의 눈에는 조선인, 필리핀인, 이런 사람들의 모습은 안 보이는 것이다. 소설에는 과달카날 섬에서 처참하게 전사한 일본군 병사들의 이야기가 여러 차례 나온다. 여기에 대해서는 “대본영과 일본군의 가장 어리석은 본질이 드러난” 장면이라는 비판이 가해진다. 잘못된 작전으로 아사한 병사들의 모습을 묘사할 때는 “설 수 있으면 한 달, 앉을 수 있으면 삼 주, 누운 사람은 일 주, 누운 채 소변을 보는 사람은 사흘, 말을 못하는 사람은 이틀, 눈을 깜빡이지 못하는 사람은 하루 목숨”이라는 실감나는 표현도 등장한다. 그러나 과달카날 섬에는 일본 군인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2,200명의 조선인 노동자를 포함한 수천 명이 공항을 건설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의 운명에 작가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일본의 야욕 때문에 전쟁터가 된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평양의 섬들에 살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소설의 한 대목에는 일본군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사람이 종전 후 미국을 방문해서 미군 전투기 조종사 출신 퇴역병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투를 한 사이지만 이들은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 다른 아시아인들을 전혀 등장시키지 않으면서 이런 내용까지 있는 것은 솔직히 어떤 콤플렉스의 표현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러다보니 저자의 비판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 자체의 잘못이라는 대전제는 교묘하게 피한 채 전략전술적인 면에 머무를 때가 많다. 사이판을 점령한 미군은 다음 목표로 필리핀을 점령하려 하는데 필리핀이 점령되면 석유 등의 자원도 끊어지게 되므로 필리핀은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고 늘어놓은 다음, 필리핀 사수 작전과 관련된 일본군 지휘부의 잘못된 판단을 비난하고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일본군 병사들의 생명을 애도하는 식이다. 그러나 애초에 왜 필리핀을 일본이 차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가미카제 특공대원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병사들의 생명을 희생시킨 군 지휘부의 잘못만을 지적하고 막상 가미카제 대원들의 심리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피해간다. “죽으러 떠나면서도 미소를 짓고 갔다." 는 식의,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모습이 전부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전쟁을 치러야 했던 군인들이 실제로 내면에 어떤 심리를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서 점령된 지역의 사람들이나 포로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외면하고 있다. 말하자면, 일본군 병사들이 중국 사람들이나 미군 포로들을 상대로 ‘목베기 내기’를 한 이야기가 없는 것이다.

소설이 정치적으로 올바를 필요는 없다. 항상 모든 사람들의 모든 이야기를 다 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연쇄 살인범의 시각에서 그의 이야기를 쓴 소설을 놓고, ‘왜 피해자의 사연은 담지 않느냐’고 비판하는 것은 소설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의 말일 뿐이다. 그러나 <영원의 제로>와 같은 소설은 스스로를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떤 선에서 양심과 타협하는 장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이 책을 읽은 많은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이 은연중에, “민족이나 국민들 사이에 우수함과 열등함에 차이가 있으며, 일본인이 미국 같은 선진국 사람들에 비해서 조금 부족하지만 다른 아시아인들에 비해서는 낫다”는 시각이 깔린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관료주의적이고 경험없는 대본영 장군들의 판단 착오 끝에 죽어간 수많은 일본 군인들을 애도하면서도 그들에 의해 죽어간 수많은 아시아 사람들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군국주의나 전쟁에 반대하는,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타협의 프레임을 제공하는 소설은 잘 팔린다.

일본에서 이 책은 500만부가 넘게 팔린 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저자인 햐쿠타 나오키가 방송 작가 출신이라는 것이 실감날 만큼 잘 만든 한편의 TV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게 한다. 디테일을 알게 되는 재미가 있고(태평양 전쟁이나 당시 각국이 사용한 전투기 등에 대한 취재가 매우 잘 되어 있다) 드라마처럼 짜임새도 있어서 쉽게 읽힌다.

태평양 전쟁을 소재로 일본 작가가 쓴 소설이어서 그렇지, 우리 사회에도 이런 식으로 차별적인 사고나 퇴행적인 주장이 숨쉴 수 있는 "타협의 지점"을 만들어주는 장치는 적지 않다. 그런 걸 생각하면서 읽으면 매우 흥미있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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