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굿 스멜
빨래를 개려고 속옷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낡았다. 5년 전쯤, 여러 장의 속옷을 한꺼번에 샀는데, 그중 하나였다. 그 이후로는 속옷을 한 장도 사지 않았다. 내 옷장엔 그보다 더 오래된 속옷들도 있었다. 매일 갈아입는 속옷이니 세탁기와 옷장을 수도 없이 오갔으리라. 당연히 낡을 수밖에. 알뜰하다고도 봐줄 수 있지만 그건 너무 불공정한 대우였다. 내 소중한 곳(?)을 감싸주는 고마운 팬티에 이렇게 무심했다니. 늘 내 피부와 가장 가까운 최전방에서 수고를 아끼지 않은 팬티였다.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이렇게 낡을 때까지 두는 게 아니었다. 5년 동안 겉옷은 뻔질나게 사댔으면서.. 내가 낡을 때까지 입었던 겉옷이 하나라도 있었던가. 속옷은 언제나 겉옷에 밀려 뒷전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겉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겉으로 보이는 것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이었나 보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중에서
나는 평소에 많이 걸어 다니고, 뛰고, 서있는다. 운동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활동적인 공간에서 일하다 보니 움직이는 시간이 많다. 다리는 어느 정도 적응이 돼서 안 아프다. 다만, 발에 땀이 많이 난다. 몸에 원래 열이 많기도 하지만 신기하게 발에는 더 많다. 하루동안 열심히 눈물을 흘린 발에게 내가 주는 선물은 물과 비누다. 고마운 마음에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씻겨 주고 싶다. 하지만 양말을 벗으면 눈길조차 안 주고 인정 사정없이 빡빡 닦는다.
” 어우 오늘 스멜 굿. 너 오늘 진짜 열심히 살았구나. 으 안 되겠어. 너는 그냥 비누 거품으로 뭉개져야 해 “
그렇게 씻고 나와서도 발은 또다시 일한다. 집에 있는 머리카락을 밞고, 아까 요리하다가 흘린 소금 밞고, 방으로 들어가다 책상다리에 부딪치고. 침대에 누우면 발이 그토록 기다리던 휴식시간이 찾아온다. 그런데 지독한 주인은 발에게 따뜻하고, 포근한 이불조차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는 동안에 발이 답답하면 잠이 안 온다.
자고 일어나면 발은 차가운 화장실 바닥을 밞고, 대충 발매트로 쓱쓱 닦인 다음, 옷을 입는다. 양말은 3년 전에 산거다. 이상하게 내 양말은 구멍이 잘 나지 않는다. 스멜이 더 강해질까 봐 다른 건 잘 안 해도 발톱만큼은 항상 때맞춰 커트하기 때문이다. 커트하는 스타일은
살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빡빡 깎는다.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발에게 딱히 관심이 없다. 지금도 책상 아래에서 피가 쏠리며 묵묵하게 날 기다린다. 스멜이 났다는 건 그만큼 열심히 일했다는 걸 어필하려는 표시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걸 보고 더 싫어했다. 아니 솔직히 극혐 했다. 생각해보니 익숙함에 속아 그런 발에게 몹쓸 짓을 했다. 너무 미안해서 양말 신은 내 발에게 눈길을 줬다.
검은색 양말인데 얼룩덜룩하다. 발목은 목도리도마뱀처럼 늘어나있다. 발 꿈치는 저스틴비버 똥산 바지다. 발가락은 실밥이 터졌다. 아 거꾸로 신어서 그렇다. 평소에 얼마나 관심이 없었던 걸까. 안 되겠다. 좀 더 따뜻하고, 촉감 좋은 양말이라도 사줘야겠다. 네가 스멜로 관심을 끌기 전에 이제는 내가 먼저 관심을 줄게.
위에 있는 책 구절처럼 나에게도 속옷은(양말,팬티) 언제나 겉옷에 밀려 뒷전이었다. 어차피 밖에 나가면 다른것에 가려진다. 어차피 대부분 비슷하게 생겼다. 어차피 냄새만 안 나면 된다. 하지만 없으면 불편하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었다. 그래. 있을 때 잘해야지. 속옷 얼마 하지도 않는 거 뭐가 아깝다고 그렇게 아꼈을까. 아니 아낀다는 핑계로 3년 동안이나 안 바꿨을까. 겉옷은 1년만 지나도, 유행만 지나도 바꿨는데. 양말도 그렇고, 팬티도 그렇고 내가 그동안 무관심했다. 인정!
그래서 오랜만에 속옷을 사러 갔다. 이왕 사주는 거 유명한 브랜드 CK로 갔다. '그래 그동안 네가 고생한 거 내가 다 안다. 크게 함 쏠게!' 팬티를 봤는데 한 장에 3만 원 했다. ‘에이 남자가 쪼잔하게 겨우 한 장은 좀 그렇잖아. 세 장 사줄게 저기에 있는 쓰리팩 함 보자. 어? 마침 딱 할인가네. 너 럭키비키구나 운 좋은 녀석. 3장에 6.9만 원 이네. 아니 진짜 왜 이렇게 비싼 거야. 팬티 일단 잠깐 기다려. 양말부터 보고 오자. 양말 한 켤래에 만원. 와 진짜 너무하네. 다른 매장으로 가보자. 오 라코스테. 그래 이게 더 트렌디해. 팬티 3종 4만 원. 에이 색상도 별로인데 너무 비싸다 정말!’
결국 하나도 못 샀다. 집에서 속옷들을 다시 보는데 나랑 추억이 많은 친구들 밖에 없었다. 역시나 낡은 녀석들 뿐이다.
그날만은 내 발에게 이불을 한가득 덮어주고 잤다. 두 눈을 감고 내 소중한 그곳(?)과 발에게 마음의 편지를 썼다.
(BGM : i believe-신승훈)
' 인정할게. 나도 어쩔 수 없이 겉으로 보이는 것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인가 봐. 너한테 좋은 옷을, 좋은 촉감을 선물해주려고 했지만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금액에 깜짝 놀랐던 게 사실이야. 분노하기까지 했단다. 물론 바로 옆에 있던 폴로 매장에서 스웨트 셔츠 1장에 16만 원인걸 보고 엄청 싸다고 사긴 했어. 그래 그건 10년 입을게.
지금 너에게 편지를 쓰다 보니 4단계 까지 왔어. 너희들도 오늘 신상 옷을 못 입어서 우울했지? 힘들었으니까 일단 한숨 자자. 푹 자고 일어나면 내 마음이 5단계가 되어 있을지도 몰라. 그럼 잘 자 ‘
(BGM : 모닝콜)
아침이 되고 난 다 까먹었다. 평소처럼 팬티는 대충 꺼내 입고, 양말은 뒤집어 신었다. 그리고 빠르게 집을 나갔다. 지금 글을 쓰면서야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래 사자. 결국 5단계 수용했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 짜식들 앞으로는 소중하게 다루어주마.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