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그녀의 사망 원인은 '미상'. 하지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이건 결국 '건강할 거라 믿고 방치한 삶' 때문이라는 걸. 그 생각이 하주의 마음을 묵직하게 눌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잠시 벽에 등을 기댔다. 차가운 벽의 감촉이 아니었다면, 순간 휘청였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나이가 젊어도 과로를 계속하면 몸은 결국 한계를 넘는다. 젊다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30대 여자, 집에서 CPR이요!"
119 구조대와 통화가 끊긴 순간, 응급실의 공기가 바뀌었다. 평소엔 낮게 웅성거리던 소리, 차분하게 움직이던 사람들의 동작이 일제히 멈췄다. 숨을 고르는 짧은 정적. 곧이어 의자 밀리는 소리, 발걸음, 손이 스치는 소리가 한데 얽혔다. 생사의 문이 전화 한 통에 열리면, 의료진의 손과 발은 쉴 새 없이 분주해진다. 환자 도착까지, 길어야 5분. 너무 많은 손길, 겹치는 움직임 속에서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 오히려 그 혼란마저도, 한 폭의 그림처럼 섬세하게 이어졌다. 긴박함 속에도 질서가 살아 움직였다.
"하주 쌤, 인튜베이션 물품부터 챙겨줘. 상혁, 제세동기랑 에피네프린 확인해 줘."
"하아... 진짜 끝도 없다, 끝도 없어."
오상혁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더니 장갑을 끼며 중얼거렸다.
"야, 또 CPR이야? 이번 주만 몇 번째냐?"
"열 번은 넘었겠지."
하주는 짧게 대답하며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장비를 챙겼다.
“진짜 지치는구먼...”
상혁은 지친 눈으로 소생실 안을 둘러봤다. 그는 169cm의 단단한 체격으로 충전 중인 제세동기를 옮겼다. 늘 피곤한 얼굴로 다녔지만, 막상 위급한 순간이 오면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하주 또한 능숙한 손길로 기관 내 삽관 도구를 챙겼다. 파란색 근무복 위로 비치는 선명한 잔근육이 그의 체격을 드러냈다. 2년 전부터 꾸준히 헬스를 하며 체력을 길러왔지만, 연이은 3교대 근무 속에서 몸이 점점 야위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런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키만 컸어도 배우로 이 짓을 했을 텐데.’
삐용-삐용-
이런 생각도 잠시, 구급차가 도착하자 그의 커다란 눈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주황색의 구급대원들이 신속하게 차량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의 옷은 응급실의 하얀 조명 아래서도 선명하게 빛났다. 침착하지만 빠른 걸음. 단호한 눈빛. 몇 년째 같은 장면을 보고 있지만, 그들이 들것을 밀며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마다 응급실의 공기는 더욱 팽팽하게 조여졌다. 쌍꺼풀 짙은 눈매가 환자를 향했다. 들것 위에서 한 젊은 여성이 가슴압박을 받고 있었다.
"대원님, 환자 상태 인계해 주세요. 왜 심정지가 발생했나요?"
"특이병력은 없어요. 보호자가 외출 후 귀가했을 때 의식이 없다고 신고했어요. 도착 당시 이미 pulseless(무맥박) 상태라 바로 CPR 시작했습니다. 병원 오기까지 10분 정도 걸렸어요."
하주는 보호자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경악과 공포,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최근 건강 상태에 대해서 보호자가 말한 게 있나요?"
"야근이 잦았고, 주말에도 계속 일했다고 합니다. 몸무게가 최근에 급격하게 줄었대요. 병원에 가보자는 말을 해도 본인이 괜찮다면서 버텼다고..."
심폐소생술이 진행되는 동안 보호자는 곁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하주는 정확한 정보 파악을 위해 보호자에게 직접 질문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어요... 일이 많아서 힘들어 보이긴 했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하주가 짧게 숨을 삼켰다. 이런 상황, 사실 몇 번이나 봤다. 그것도 최근에 집중적으로 왔다. 건강했던 젊은 사람이 '설마 내가 쓰러질까?' 하며 몸을 혹사시키다가, 정작 몸이 한계를 넘으면 너무 늦어버리는 상황. 그녀는 야근이 많았다. 주말에도 일했다. 일상 자체가 바빴다. 몸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병원에서, 혹은 광화문 빌딩 숲에서, 매일 밤 자신의 수명을 갉아먹으며 성과를 증명해야 하는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경력을 쌓지 않으면 더 나은 곳으로 갈 수 없다는 불안감. 그 속에서 자기 몸을 돌본다는 건 어쩌면 사치처럼 느껴졌을 뿐이다.
"에피네프린 투여했습니다. 리듬 확인합니다! asystole(무리듬) 계속 CPR! 하나 둘 셋 넷...“
빠른 명령과 기계음, 거친 숨소리가 교차했다. 순간순간이 생사의 기로였다. 최선의 처치에도 그녀의 심장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심전도 모니터에서는 긴 가로줄만 계속해서 나왔다. 심폐소생술을 한 지 30분이 지나고 교수님은 사망을 선고했다.
그녀의 사망 원인은 '미상'. 하지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이건 결국 '건강할 거라 믿고 방치한 삶' 때문이라는 걸. 그 생각이 하주의 마음을 묵직하게 눌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잠시 벽에 등을 기댔다. 차가운 벽의 감촉이 아니었다면, 순간 휘청였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나이가 젊어도 과로를 계속하면 몸은 결국 한계를 넘는다. 젊다고 해서 예외는 없었다.
삑—
심장 모니터의 규칙적인 소리가 멈추고, 순간 응급실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그녀의 가족들이 마지막 면회를 했다.
"여기 방금 온 환자인데 바이탈 안 좋아요. BP(혈압) 60대예요. 바로 들어갈게요."
또 다른 환자가 119 대원과 함께 응급실로 들어왔다. 가족들의 오열하는 소리에도 응급실은 무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야, 임하주."
신태호가 하주의 어깨를 툭 쳤다.
"환자 왔잖아. 초진 보러 안 가? 오늘따라 왜 그래?"
"... 아냐."
하주는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솔직히, 오늘따라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찝찝했다. 뭔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제 와서 왜 이렇게 감성적이야?"
태호가 조용하고 낮게 말했다.
"이런 거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잖아."
"알지. 그냥... 이번엔 좀 다르게 느껴져서."
태호는 피곤한 듯 코끝을 만지며 말했다.
"너무 감정 쓰지 마. 언제나 똑같은 일상이야. 무너지면 더 이상 일 못한다는 거 너도 알잖아."
퇴근 준비를 하던 오상혁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오늘 진짜 미쳤다. 야, 나 5시간 동안 한 번도 못 앉았다? 진짜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해? 우리 나이도 이제 계란 한 판 넘어섰어. 이러다가 계란 다 깨지는 거 아니냐."
태호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오늘따라 넌 유난히 더 징징대네?"
"아니, 솔직히 너도 안 그래? 밤에 잠도 못 자고 제대로 된 휴식도 없잖아"
하주는 아무 말 없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망설여졌다. 결국, 그는 창밖에 밝아오는 아침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계속 간호사를 할 수 있을까?'
그 생각이 들자마자 하주는 피식 웃었다. 사직서를 던진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삼교대 근무라지만 비교적 높은 연봉을 포기하고, 익숙한 환경을 떠나는 것. 익숙한 만큼 지겹고 힘들었지만, 동시에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하주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버스에 올라탔다. 출근길과 다를 바 없이 붐비는 버스 안. 많은 사람들이 타 있었지만, 공기는 묘하게 조용했다. 피곤한 얼굴들. 누군가는 출근 중이고, 누군가는 퇴근 중이었다. 그런데도 분위기는 이상하게 비슷했다. 각자 다른 방향을 향하는 발걸음인데, 어쩐지 모두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들 사이에 묻혀 있으니, 하주는 자신이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창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창문 너머로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을 감고 싶은데, 아침 햇살이 끊임없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마치 '일어나, 이대로 잠들면 안 돼'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밥을 대충 입에 밀어 넣고, 샤워 후 침대에 몸을 던졌다. 상체만 잠깐 일으켜서 암막 커튼을 쳤다. 빈틈 사이로 스며든 희미한 빛이 방 안을 어렴풋이 비췄다. 하주는 눈을 감았지만, 머릿속은 계속해서 돌아갔다.
‘버티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놓아버려야 하는 걸까?’
깊은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가라앉는 몸과 달리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편안한 자세를 찾고 말겠다는 의지로. 그때였다. 무거운 눈꺼풀이 내려앉자, 낯선 장면이 꿈결처럼 스쳤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낯익은 유럽의 도시. 좁은 도로 양옆에는 크림색 톤을 아낌없이 바른 집들이 줄지어 있었다. 붉은 지붕들은 아침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번졌고, 강물은 그 빛을 고요히 끌어안았다. 오래된 다리 위로도 햇살이 마구 쏟아졌다. 이른 아침부터 다리 위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웃으며 걸어 다녔다. 하주는 그 장면을 바라보며, 자신의 숨결 속에도 낯선 공기의 맑음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햇살은 너무도 선명해 눈을 감아도 눈부심이 남았다. 안개도, 미세먼지 따위도 없는 아주 맑은 날씨. 눈을 돌리는 순간, 그는 낯선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을 열고, 무언가를 쓰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옆에는 따뜻한 라테 한 잔에서 김이 나왔고, 그 향만으로도 삶이 새롭게 시작되는 듯했다.
모든 것이 자유와 해방, 다시 살아가는 빛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라테로 손을 뻗는 순간, 그 빛이 손끝에 닿기도 전에 흩어졌다. 눈을 뜨자, 다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응급실의 공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