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
머릿속에 계산기를 넣고 다니는 남자. 하주의 삶은 언제나 정밀하게 짜인 동선 위에 있었다. 그가 간호사 국시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시간에 15쪽, 오답 정리 30분, 식사 22분, 낮잠 18분, 양치 5분, 커피 사 먹기 2분.’ 하주는 자신만의 루틴을 충실히 따랐고, 결국 원하는 병원에 합격했다. 그는 믿었다. 성실히 살면, 삶도 성실하게 나아질 거라고. 하지만 그 계산에 빠진 게 하나 있었다. 삶은, 생각보다 계산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햇빛이 스며드는 암막커튼 틈 사이, 어설픈 이불 위에 누워 있던 스물여섯의 하주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자취 첫 달, 작은 원룸은 조용했다. 아니, 지나치게 고요했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 냉장고 모터의 진동이 이따금 들려왔지만 그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소리를 지워놓은 것처럼, 고요함은 오히려 부담스럽게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이 모든 풍경이 하주의 눈앞에 펼쳐졌지만, 그저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바라볼 뿐이었다.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은 움직이질 않았다. 아니, 어쩌면 마음이 먼저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천장을 바라본 채 멈춰 있는 동안, 그는 아주 천천히 매트리스 속으로, 바닥을 뚫고, 건물 아래 축축한 땅속으로 가라앉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고요한 방 안에서, 고요하게 가라앉는 중이었다. 그의 몸은 윤곽이 흐려지다, 이내 방 안의 공기와 뒤섞여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얕은 숨결과 함께, 흐릿했던 몸의 감각이 희미하게 돌아왔다. 이불이 피부에 닿는 감촉, 베개에 짓눌린 머리의 무게가 느껴졌다. 비로소 자신이 아직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하주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제 밥 챙겨 먹는 것도 귀찮다.‘
쉬는 날 마음먹고 해 두었던 밥도, 근무 후 집에 돌아오면 이불 위에 그대로 쓰러지는 바람에 입에도 못대기 일쑤였다. 병원에서도 식사는 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밥시간이면 환자의 상태가 급변했고, 누군가에겐 간절히 기다리던 면회 시간이 되곤 했다. 간호사로서 환자 상태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건, 그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따라서 식사는 생존이 아닌 선택이 되었다. 피곤하면 건너뛰는 것. 시간이 없으면 잊고 지나가는 것.
어느 순간부터 하주는 배고픔보다 피로에 무너지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밥보다는 잠, 잠보다는 다음 근무. 그렇게 매일을 넘기며 자신을 돌보는 일은 미뤄졌다. 스스로를 방치하는 일엔 점점 능숙해졌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선 여전히 같은 생각이 맴돌았다.
‘그래도 간호사면, 잘 살겠지...’
짧지만 단단한 그 믿음 하나가 그를 버티게 만들었고, 또 그렇게 하루를 넘기게 만들었다.
하주는 전형적인 계획형 인간이었다. 처음 서울에 올라와 자취방을 보러 다닐 때조차 모든 동선을 시간 단위가 아니라 분 단위로 계산했다.
‘고속터미널 도착 후 10분 안에 지하철 탑승. 공항행 방면 21분, 4번 출구 하차. 에스컬레이터 1분, 도보 5분, 잠깐 여유롭게 물 사 먹는 시간 3분 포함, 총 40분 이내 부동산 도착. 이제 한 달 후면 서울에 올라가니까 미리 사장님에게 연락을...’
머릿속에 계산기를 넣고 다니는 남자. 하주의 삶은 언제나 정밀하게 짜인 동선 위에 있었다. 그가 간호사 국시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시간에 성인간호학 15쪽, 오답 정리 30분, 식사 25분, 낮잠 15분, 양치 3분, 커피 타먹기 3분’
하주는 자신만의 루틴을 충실히 따랐고, 결국 원하는 병원에 합격했다. 그는 믿었다. 성실히 살면, 삶도 성실하게 나아질 거라고. 하지만 그 계산에 빠진 게 하나 있었다. 삶은, 생각보다 계산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불규칙한 3교대, 예측 불가능한 응급 상황, 반복되는 피로, 커지는 고민들. 모든 것이 그의 계획에서 점점 벗어나려 했다. 하주는 힘들어도 끝까지 붙잡고 싶었다. 마치 그것만이 일상을 붙들어 주는 유일한 구조물이라도 되는 듯이.
그때였다.
조용하던 원룸 안에 낯선 울음소리가 스며들었다. 처음엔 멀리서부터 흐릿하게, 그리고 점점 가까이.
“흐윽... 제발... 제발... 눈 좀, 눈 좀... 제발 떠 봐...!"
갑작스레 눈앞의 모든 장면이 바뀌었다. 30대 초반의 여자. 쌍꺼풀 진 눈을 꼭 감고, 차가운 침상 위에 누워 있던 그 모습. 고개를 세차게 저었지만 그 장면은 머릿속에 고정되어 있었다.
삑———
심장 모니터가 멈추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고막을 찢는 듯한 보호자의 절규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으아아아악!”
하주는 숨이 턱 막혀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그는 수면 위로 뛰쳐나온 사람처럼 숨을 헐떡였다. 이불은 땀에 젖어 있었고, 암막커튼을 뚫고 들어온 오후 햇살이 방 안 한구석을 물들였다.
꿈이었다.
하지만 전혀 꿈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앉은 채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코끝에 맴돌던 눅눅한 곰팡이 냄새 대신,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기가 났다. 좁고 답답했던 원룸이 아니라, 주방이 분리된 쾌적한 투룸이었다. 싱크대에는 설거지할 그릇 하나 없었다. 바닥엔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5년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그런데 왜 마음은 아직 그 곰팡내 나는 방 안에 갇혀 있는 걸까. 밖은 바뀌었는데, 안은 아직 그대로인 느낌. 그게 더 무겁게, 더 깊이 파고들었다.
삶은, 어쩌면 겉모습만큼은 계획대로 흘러온 듯 보였다. 하주는 여전히 이불을 움켜쥐고 있었다. 가슴 한편에 깊게 박힌 감정은 다섯 해 전, 그 무력한 방에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 바뀐 건 환경이었을지 몰라도, 마음은 아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왜 이렇게 선명한 걸까? 그녀는 하주에게 단순한 환자가 아니었다. 어쩌면 ‘나일 수도 있었던 사람’. 혹은, 언젠가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매일이 무슨 요일인지조차 모르게 흘러가는 삶.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일에 쏟고, 식사는 뒤로 밀리고, 머릿속은 끊임없는 책임과 근무로 가득 찬 하루.
'지금의 나와 그녀는... 정말 멀리 있는 걸까?'
하주는 무의식적으로 침대 옆 협탁에 있는 태블릿을 열었다. 언제나 그랬듯 습관처럼 손이 먼저 움직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움직이는 손끝에 힘이 없었다.
[임하주 계획표]
익숙한 루틴이 화면에 나열되어 있었다.
[기상 시간, 출근 준비, 스트레칭, 명상 10분, 식사 30분, 헬스장 1시간...]
그는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가, 항목들을 하나씩 터치해 삭제했다. 툭— 사라지는 텍스트처럼, 오늘의 의지도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았다. 계획은 언제나 그를 붙들어 주는 방식이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한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 요즘은. 그조차 점점 흔들리고 있었다. 하주는 조용히 아래 입술을 치아로 눌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계획이 아니라... 방향이 필요한 건가...”
하주는 조용히 태블릿을 덮었다. 그 순간, 침대 옆에 있던 휴대폰 화면이 '브링-' 하는 짧은소리와 함께 깜빡였다.
화면 위로 떠오른 이름. [최창수].
하주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심장이 이유 없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목 안쪽에서 시큼하고 씁쓸한 것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그 이름은 가끔, 아무 예고 없이 찾아왔다. 대부분 피로하거나, 감정이 소진된 날일수록 더 자주. 그래, 창수는 늘 이렇게 불쑥이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한참을 망설이다, 하주는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지금은 아니었다. 저 이름이 가진 반짝임을, 지금의 자신은 도저히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눈은 떴지만, 마음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채였다. 그는 이불을 다시 턱밑까지 끌어당겼다.
"뭐 잘 지내고 있겠지, 너는."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아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