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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나의 목소리가 들려

소설 연재

by 태섭
강연자와 청중의 눈빛이 마주치고, 고요한 공감의 파동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그는 자신이 준비한 모든 것을 넘어, 삶 그 자체를 쏟아붓고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어떤 불안도, 계산도, 계획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저 현재에 온전히 잠겨, 순수한 에너지로 충만해지는 느낌. 독자들의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에너지가 자신에게 스며들고, 자신의 진심이 다시 그들에게로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광화문 교보문고 빌딩 16층.


출판사 [온리북하우스]의 로비는 하주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조용하고, 더 서늘했다. 회색빛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된 벽에는 그가 지난 일 년간 밑줄을 그으며 읽었던 베스트셀러들이 액자 속 그림처럼 걸려 있었다. 익숙한 제목들이 낯선 위압감으로 어깨를 눌렀다. 로비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원목 테이블 위에는 아직 잉크 냄새도 가시지 않은 신간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종이와 커피, 그리고 지성이 뒤섞인 낯선 향기가 그의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임하주 작가님, 이쪽으로 오시죠.”


단정한 단발머리의 편집장이 회의실 문을 열며 그를 안내했다. ‘작가님’이라는 호칭이 아직은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했다. 통유리로 된 회의실 벽 너머로 경복궁의 고즈넉한 기와지붕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풍경을 등지고 앉은 마케팅 팀장의 눈은 날카로웠지만,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하주가 보낸 원고 뭉치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작가님 글, 저희 팀원들이 모두 돌려 읽었습니다. 다들 비슷한 말을 하더군요. ‘마치 내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같았다’고요.”


그녀의 표정은 칭찬인지 평가인지 모호했지만, 하주는 그 말의 무게를 알 수 있었다. 그의 가장 사적인 기록이, 이제 세상과 소통할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려 하고 있었다.


“저희는 이 글이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임하주’들의 목소리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 ‘확신’이라는 단어 앞에서, 수없이 흔들리고 주저앉았던 지난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동료들의 비난과 번아웃에 숨 막혔던 응급실의 공기. 이천만 원이 사라졌던 통장 잔고. 수상자 명단 속에서 끝내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했던 모니터의 차가운 빛까지. 드디어 이번 확신은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내내, 하주는 창밖의 기와지붕이 아니라 회의실 벽에 걸린 저 빈 액자 자리를 보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의 책이 걸릴지도 모를, 바로 저 자리를.


일 년 뒤, 그의 삶은 상상 이상으로 변했다.


쉬는 날 익숙한 발걸음이 그를 교보문고로 이끌었다. 자동문이 열리자 코끝으로 익숙한 향기가 다가왔다. 나무 결이 살아 있는 책과 책장들, 종이 냄새가 은은하게 감도는 공기. 숲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 같았다. 하주는 홀린 듯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멈춰 섰다. 입구에서 가장 잘 보이는 책장. 환한 조명 아래, 너무나도 익숙한 표지의 책이 놓여 있었다. 하주는 순간 숨을 멈췄다.


'잘못 본 거겠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심장이 귀에서 뛰었다. 정말, 자신의 책이었다.


[누군가 내 일기를 훔쳐보면 좋겠어-임하주]


책장 위에는 빨간색 글자와 노란색 조명으로 ‘베스트셀러’라며 빛나고 있었다. 하주는 조심스럽게 책 표지에 손을 댔다. 책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자신이 쏟아부은 문장들이 온기를 품고,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거치며 데워진 것만 같았다.


그 온기는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삼교대 간호사가 쓴 솔직하고 담백한 성장기는, 번아웃과 싸우는 이 시대 청춘들의 마음을 정확히 관통했다. ‘임하주’라는 이름 앞에는 ‘작가’라는 수식어가 더는 어색하지 않게 붙었고, 강연 문의가 쇄도했다. 여러 제안 중 그의 심장을 뛰게 한 것은 단연 별마당 도서관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강연을 준비하는 한 달이라는 시간은 화살처럼 지나갔다.


마침내, 하주의 발걸음이 삼성동 코엑스 별마당 도서관의 단상 위로 향했다. 그는 이 장소를 여러 번 왔었다. 신간 코너를 서성이며 미래를 꿈꾸기도 했고, 구석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기도 했다. 강연장 단상 위에서 빛나는 작가들을 보며 남몰래 부러워하기도, 때로는 자신도 저 위에 있을 날을 상상하기도 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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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병원 응급실 7년 차 간호사. 밤샘 근무와 번아웃 사이에서 읽고 쓰는 일로 제 마음을 붙들어 왔습니다. 제가 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도 작은 위안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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