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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퇴사 호소인

소설 연재

by 태섭
ㄹ한강 다리를 건너는 내내, 그는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퇴사는 누군가에게는 대단해 보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미련한 짓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퇴사를 염원하는 상혁과, 병원에 남아 자신만의 행복을 찾는 태호. 잘나서 그만두는 것도 아니고, 못나서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각자만의 생각의 차이와 행동의 차이일 뿐. 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 창수의 웃음, 그리고 찬식쌤의 마지막 조언까지. 그 모든 목소리가 하나의 질문을 향하고 있었다.

하주에게는 두 개의 삶이 생겼다. 하나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삶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삶을 구원하는 삶이었다.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음에 너무나도 감사했다. 즐거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깨닫게 되었다. 두 개의 삶을 하나의 몸으로 온전히 살아낼 수는 없다는 것을.


첫 강연의 성공은 달콤했지만, 그 열매는 생각보다 고단했다. 여러 강연 요청이 쇄도했고, 하주는 기꺼이 응했다. 일주일에 나흘은 간호사로 생명을 돌봤고, 사흘은 작가로서 독자들의 마음을 돌봤다. 정작 자신의 마음을 돌볼 시간은 없었다. 강연장의 뜨거운 조명이 꺼지고, 작가 ‘임하주’의 가면을 벗으면, 남는 것은 다음 날 새벽 출근을 걱정해야 하는 간호사 ‘임하주’의 텅 빈 몸뚱이뿐이었으니까.


고요한 공허와 함께 새로운 질문이 찾아왔다. 하주는 몇 개의 강연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야만 했다. 눈길을 책장으로 돌렸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갈망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책장을 천천히 훑었다.


[연금술사-파울로 코엘로]


파란 배경에 갈색 피라미드가 그려진 고전 소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마침내 보물을 찾아 나서는 어느 양치기의 이야기. 책을 읽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 소설 속 주인공인 '산티아고'의 삶이 자신과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언어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번에는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나만의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근데 내가 감히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손가락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나이트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하주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길을 잃었다. 몸은 젖은 솜처럼 무거웠고, 잠을 깨기 위해 진하게 내린 커피에서는 쓴맛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밤새도록 울리던 심전도 모니터의 날카로운 경고음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글을 쓰는 시간과, 글을 쓰기 위해 버텨내야 하는 간호사의 시간이 서로를 잔인하게 밀어내고 있었다.


하주는 쓰던 내용을 저장하고(많이 쓰지도 못했지만), 바탕화면으로 나왔다. 자신의 오래된 첫 원고 파일이 보였다. 클릭해서 둘러보고 있는데, '발전하고 있는 것'이라며 등을 두드려주던 남궁수 교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하주쌤, 당신 안에는 초대형 거인이 살아 움직인다는 걸, 이제 증명해야 하는 순간이에요.'


하주는 다 식어버린 커피 잔을 보며 중얼거렸다.


"벽이라... 이번 벽은 너무 높은데요, 교수님.”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거인은 벽을 넘기도 전에 지쳐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의 질문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퇴사해야 할까?’


며칠 후, 아침 근무로 교대가 다시 바뀌었다. 7년이나 지났지만, 밤낮이 뒤바뀌는 교대 시간의 적응은 여전히 어려웠다. 몽롱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하주의 발걸음이 병원 앞 카페로 향했다. 진한 에스프레소 향이 코끝을 찌를 때쯤, 호출벨이 울렸다. 카운터로 커피를 받으러 가는데, 바로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호였다.


“야, 너는 무슨 작가라는 놈이 얼굴은 더 시커메졌냐.”


태호는 이른 아침부터 생생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예전과 달리 어딘가 편안했다.


“너는 온몸이 다 탔는데? 은근히 어울리네. 요즘 뭐 좋은 일 있어?”

“나? 그냥 쉬는 날마다 등산 동호회 나가. 얼마 전엔 설악산 대청봉도 다녀왔다.”


태호는 쑥스러운 듯 휴대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땀에 젖었지만, 그가 지어본 적 없는 환한 웃음이었다.


"이야, 경치 장난 아니네. 완전 제대로 하나 봐?"

"에이 그 정도는 아니야. 너처럼 인생 걸고 뭘 하진 못해도, 그냥 이렇게라도 숨통 트는 거지 뭐. 야 임하주, 요즘 힘들면 체력 키우게 나랑 등산이나 같이 가자.”


안정적인 삶 속에서 자신만의 속도를 찾아가는 태호의 모습은, 분명 하나의 답처럼 보였다. 하주는 진심으로 그의 행복을 축하해 주었다. 저 고요한 정상의 풍경이, 지쳐있던 친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느껴졌다. 저 고요함이, 자신이 가슴 뛰어하며 찾아 헤매는 '보물'은 아니라는 것을.


그때, 상혁이 요란하게 다가와 하주의 등을 쳤다.


“요! 두 분 여기서 밀회 중? 임 작가님! 내가 이번 쉬는 날에 아파트 보러 갔다 왔는데, 거기에 기가 막힌 제육볶음 집이 생겨버렸어. 제육 하면 또 남자의 심장 아니겠냐. 이번 쉬는 날에 같이 임장 한 번 고고?”

“너는 집 보러 가는 게 아니라 먹으러 가지?”

“야, 그게 또 임장 속 소소한 재미지! 사실 맛집 리스트도 하나 만들어서 노트에 적고 있거든. 실패해도 경험이고, 먹는 건 남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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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병원 응급실 7년 차 간호사. 밤샘 근무와 번아웃 사이에서 읽고 쓰는 일로 제 마음을 붙들어 왔습니다. 제가 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도 작은 위안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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