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총각 혹시 종교는 있니껴?
다른 사람이 우리의 목에 소화시키기 힘든 사실을 억지로 밀어 넣으려고만 한다면 반발심만 생기기 마련이다.
- 데일카네기 인간관계론 중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탔다. 오래간만에 고향에 내려가기 위해 청량리역으로 가는 길이었다. 신도림에서 청량리까지 가는데 30분은 넘게 걸린다. 들고 온 짐도 많아서 계속 서서 가기는 힘들었다. 앉아서 가고 싶었다. 하지만 주말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다들 어디에 가려고 이렇게 나왔을까. 다행히 신도림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려 자리가 생겼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빈자리를 차지했다. 너어어어어무 뿌듯했다. 기쁜 표정을 지으면서 다리 사이에 짐을 놔뒀다. 그리고 들고 온 책을 폈다. ‘데일카네기의 인간관계론’ 100년 가까이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온 이 시대의 명작! 책이 오래된 만큼 고리타분한 예시가 많았다. 그럼에도 내 상황에 맞춰서 생각해 보면 효과가 꽤 좋았다.
다음 정거장인 영등포역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이 탔다. 앉을자리가 없었다. 노약자석에도 자리가 꽉 찼다.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바로 앞에 있던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 할머니는 손사래 치며 괜찮다고 했다. 아무리 무거운 짐이 있어도 할머니가 앞에 있는데 계속 나몰라라 하고 앉아서 갈수가 없었다. 서로 앉으라는 실랑이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바로 옆 아주머니가 다음 정거장에 내린다면서 일어났다. 그래서 할머니는 바로 내 옆에 앉았다. 인자한 미소로 나를 쳐다보셨다.
“ 젊은 사람이 참 착하네. 어디까지 가니껴? “
말투에서 정겨운 사투리가 묻어났다. ‘껴?’를 쓰시는 걸 보니 나랑 똑같은 경상도에 사셨던 것 같았다. 우리 할머니가 생각났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미소를 활짝 지으며 이야기했다.
“ 네. 저 청량리까지 가요. 할머니 사투리 보니까 경상도 분이시죠? 저도 경북 영주에서 왔거든요. 오늘 고향에 가는 길이에요 ”
“ 아고. 맞나. 영주 거기 내 잘 알지. 내 동생도 거기에 있었고, 나도 그 근처에 안동이 내 고향이래. 아이고 반갑다. “
그때부터 할머니는 오랜만에 예쁜 손자를 만난 듯 좋아하셨다. 그리고 본인 이야기를 하셨다. 6.25 좀 지나고 나서 서울에 오셨다는 이야기부터. 그때는 허허벌판이었는데 여 밭이라도 하나 사놨으면 좋았겠다는 말. 그 밭이 다 이래 빌딩이 되고, 집이 되었는데 본인이 샀던 의정부 밭은 미군 부대만 들어왔다는 말. 그거라도 이제라도 고마 팔아 치운다고 말씀하지만 그럼 농사도 못 짓고 집에 누워만 있어야 된다는 말까지. 할머니 이야기가 재밌었다. 사투리가 우리 할머니 같아서 정겨웠다. 듣다 보니 어느새 서울역까지 왔다.
“ 근데 할머니는 어디서 내리세요? “
“ 이제 곧 내려. 종각에. 근데 총각 혹시 종교는 있니껴? “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종교 이야기로 훅 들어오셨다. 종교는 따로 없다는 내 말을 듣고 그때부터 설교가 이어졌다.
“ 예수님 믿어야 해. 그래야 천국간데이. 지금이라도 잘못한 거 있으면 얼른 교회가. 가서 빌어. 그럼 다 용서해 주실 거야. 예수님이 어떻게 보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존재야. 내는 이제 얼마 안남았지만 나중에 천국 가잖아. 총각도 예수님 믿어야 천국가. “
할머니가 옛날 이야기 해주실 때까지는 내 표정이 밝았다. 그런데 묻지마 예수님 공격에 표정이 점점 안 좋아졌다. 방어도 없이 너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마치 보호대 없이 복싱 선수한테 귀를 얻어맞는듯한 느낌이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만두귀가 될 것 같았다. 물론 예수님이 싫은 건 아니다. 크리스마스도 좋고, 명동 성당의 느낌도 우아하고 멋지다. 다만, 예수님 초보자에게 소화시키기 힘든 사실을 억지로 밀어 넣으려고만 하니까 힘들었다. 그래서 방어를 위해 다시 책을 폈다. 책 내용이 잘 안 들어왔지만 꿋꿋이 한 장 두 장 넘겼다. 할머니의 일방적인 공격이 점점 힘을 잃어갔다. 그리고 서로 말없이 5분 정도가 지났다.
지하철을 탄 처음부터 할머니랑 이야기를 하면서 왔다. 그래서 갑자기 조용한 분위기가 어색했다. 슬쩍 옆에 있는 할머니를 봤다.
누가 봐도 100% 삐치신 표정으로 계셨다.
두 정거장만 더 가면 할머니가 내린다고 했던 종각이었다. 내리시기 전에 끝 마무리를 잘하고 싶었다. 할머니의 기억 속에 예수 안 믿는 총각이지만, 옛날이야기는 잘 들어주는 착한 손주 같은 총각으로 남고 싶었다. 마침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책은 인간관계에 꿀팁을 알려주는 책이다.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칭찬을 잘하라고 했다. 할머니의 옆모습을 보면서 칭찬 거리를 찾아봤다. 지하철 방송이 울렸다. 다음 정거장이 종각이라고 했다. 아 시간이 없다. 얼른 말해야 하는데 뭐가 좋을까. 그때 할머니의 크고 멋진 귀가 보였다. 귓 볼이 엄청 길었다. 앗 저거다!
“ 할머니. 옆에서 보는데 귀가 참 멋지세요. 꼭 부처님 귀 같아요! “
“ 응? 내 귀가 부처 같다고? “
순간 할머니의 입꼬리가 내려간 상태에서 일자로 쫙 펴졌다. 삐친 상태에서 화난 상태로 바뀌었다.
아 맞다. 할머니 예수 믿고 계셨지. 너무 급한 나머지 좋은 걸 찾다가 할머니 반대편에 계시는 부처님을 말해버렸다. 이미 엎어진 물을 담을 수는 없었다. 닦기라도 해야 된다. 아 어떡하지. 뭐라고 수습하지.
“ 아 부처님 같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귀가 참 멋지세요. 저희 할머니한테 들었는데 부처님은 큰 귀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고 하더라고요. 할머니도 그만큼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분 같아요. 저는 사람들 중에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 가장 대단하더라고요! “
“ 음.. 뭐 내가 어릴 때부터 그런 말을 자주 듣기는 하지. 사실 내가 귀가 좀 크긴 해. 듣고 보니 부처 귀라서 그럴 수도 있겠네. “
할머니의 입꼬리가 다시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종각역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 총각 덕분에 잘 왔다. 집에는 잘 갔다 오고, 종교는 뭐 총각 믿고 싶은 거 믿어. 가래이 “
그렇게 정신은 예수, 신체는 부처를 한 할머니가 해맑게 손을 흔드시면서 내렸다.
사람을 칭찬하는 건 좋은 행동이다. 하지만 앞뒤 생각하지 않고 좋은 말만 하면 안 된다. 나처럼 곤란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칭찬하기 전에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 한다. 좋은 말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니다. 아부가 될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선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칭찬하는 것도 참 어려운 것 같다. 누구에게 칭찬을 듣거나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한번씩 할머니가 생각난다. 예수를 믿고 , 부처의 귀를 갖고 있는 종교 대통합 할머니. 다시 한 번 1호선에서 보면 좋겠다. 그때는 할머니에게 정교하게 조각된 칭찬을 드리고 싶다.
한 줄 요약 : 좋은 말이라고 다 칭찬은 아니다. 앞 뒤 생각 잘해서 말하자! 할머니 더 화내시지 않고 종교 대통합 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