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축구 동상 투어 ①
브뤼셀 미디역을 출발한 유로 스타는 런던까지 힘차게 달려갔다. 약 2시간가량 걸렸던 그 길을 내달리며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물론, 영국 방문이 처음은 아니었다. 6년 전 런던 크레이븐 코티지에서 벌어졌던 한국과 크로아티아의 A매치 친선전 취재차 찾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런던 입성을 눈앞에 두며 들뜨고 긴장했던 건, 그때 조금 더 시간적 여유가 있었더라면 런던과 ‘축구 종가’ 수도의 축구를 조금 더 느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물론 브뤼셀 미디역에서 경험한 깐깐한 영국 입국 심사 때문에 남은 긴장의 여운도 있었을 것이다. 6년이나 지났는데 어찌 그리 바뀐 게 없는지….
해리 포터가 호그와트 마법 학교를 가기 위해 기차를 기다린 플랫폼으로 유명한 세인트 판크라스역에 내렸을 때 일단 ‘그곳’을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6년 전 취재하려고 방문했던 크레이븐 코티지다. 풀럼 FC의 홈구장인 이곳은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경기장 중 하나다. 최첨단 시설이 들어선 다른 팀 경기장과 달리 백 년 전 영국 냄새가 풀풀 풍겨 그 정취가 확실히 남다른 곳이기도 하다.
그 크레이븐 코티지를 한시라도 빨리 찾아가기 위해 호스텔에 짐을 내던지다시피 하고 뛰쳐나온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방문한 날이 풀럼과 토트넘의 맞대결이 벌어졌던 터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티켓 현장 구매를 하기 위해서였고, 6년 전에 끊겼던 런던에 대한 ‘감’을 이을 수 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 때문이었다.
영국의 소문난 부촌 중 하나인 풀럼 팰리스 로드 인근을 거닐면서 새록새록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김동하 사진기자와 아웅다웅하며 동행 취재했던 추억, 루카 모드리치와 니키차 옐라비치가 펄펄 날뛰었던 크로아티아에 크게 패한 아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엉덩이 한쪽 걸치기도 힘든 좁디좁은 기자석과 당장이라도 쪼개질 듯한 오래된 나무판자로 이뤄진 테이블, 그리고 관전을 방해하는 기둥이 곳곳에 세워져 있으며, 갑갑하게 덮여 있던 철제 지붕도 기억에 남는다.
토트넘을 상대한 홈경기 티켓은 아니나 다를까 없었지만, 딱히 아쉬움이 들지 않았던 건 그래서일지 모르겠다. 하염없이 크레이븐 코티지 바로 옆길인 스티브니지 로드를 걸으면서 그때 추억을 되새기는 것만 해도 그저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메라와 짐벌을 들고 같은 길을 수없이 서성이는 어느 동양인 아재가 풀럼 직원들에게는 꽤나 이상하게 여겨졌던 모양이다. 중년의 여성 직원과 아르바이트인 듯한 십 대 흑인 청년이 도대체 뭘 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들의 눈에 이유 없이 한 장소만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혹시나 테러범이 아닐까 싶은 걱정이 들었을 터다. 그들에게 “한국에서 왔다. 6년 전에 기자 신분으로 여기에 왔는데 지금은 여행객”이라고 답했더니, “쏘니는 여기에 없어”라고 웃으며 말한다.
하필 그날, 손흥민은 2019 AFC UAE 아시안컵 출전을 위해 대표팀에 합류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한국 하면 쏘니가 자동 반사적으로 나오는 그들의 반응을 보며 꽤나 재밌기도 했다. 신나서 티켓을 못 구했지만 옛 추억을 떠올리고 싶어 자꾸 밖을 떠돈다고 하니 그제야 웃으며 마음껏 찍어가란다.
그때 크레이븐 코티지 밖을 지키는 어느 동상에 시선을 빼앗겼다. 위풍당당한 표정을 짓고 양팔을 허리춤에 두고 근엄하게 한 발을 축구공에 올린 이 동상의 주인공이 궁금해 물었더니, 그 ‘알바생’이 이렇게 말했다.
“저도 잘 몰라요. 이 사람 이름이 ‘조니’인 것만 알아요.”
그 얘기를 듣고 있던 풀럼 직원이 웃으며 덧붙여 말하길,
“영국에서 사상 처음으로 주급 100파운드(현재 가치 한화 약 15만 원)를 넘긴 선수예요. 하하.”
단편적인 지식만을 말해주었지만, 금세 이해가 됐다. 이 동상의 주인공은 풀럼 역대 최고 선수이자 전설로 꼽히는 조니 헤인스다. 1950~1960년대를 주름잡았던 선수였으며, 펠레가 “역대 최고 패스 마스터 중 하나”라고 치켜세웠을 정도로 훌륭했던 레전드였다. 웬만한 역사를 가진 클럽이라면 하나둘 쯤 가지고 있는 레전드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는데, 이 선수가 큰 의미를 지니는 데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풀럼 직원이 말한 ‘사상 최초의 주급 100파운드 선수’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1961년의 일이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할 것 없이, 당시 영국 프로축구 선수들은 클럽들의 갑질에 시달리고 있었다. 클럽 간 담합으로 이뤄진 일종의 샐러리캡에 묶여 있었다. 박싱 데이 등 한창 바쁜 겨울에는 최대 주급 20파운드(약 3만 원)를 받을 수 있었고, 휴식기인 여름에는 최대 주급이 17파운드에 불과했다. 아무리 우수한 선수라도 이 이상 받질 못했다. 정말 매우 적은 돈을 받고 뛴 것이다.
본래 영국에서는 흘린 땀의 가치를 돈으로 매겨서는 안 된다는 아마추어리즘이 득세했었다. 헤인스가 뛸 시절은 그나마 프로 관념이 서서히 뿌리를 내리던 시점이긴 했지만, 프로 선수들이 많은 돈을 받고 뛴다는 걸 보수적이었던 당시 영국 사회는 여전히 곱게 바라보진 않았다. 이에 당시 선수들이 파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당시 풀럼의 간판이자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주장이었던 헤인스는 그 선봉에 서 있었다. 그러던 중 헤인스가 통념을 깨고 당시 최대 주급 시세에 다섯 배나 많은 100파운드를 받게 된 것이다.
어떻게 다섯 배나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었을까? 헤인스가 생전에 남긴 뒷얘기가 꽤나 재미있다. 파업을 준비하던 중 토미 트린더 당시 풀럼 회장과 독대해 자신의 주급에 대해 담판했다. 트린더 회장은 세간의 주목을 받는 걸 즐기는 독특한 인물이었는데, 실제로 과한 언행으로 여러 번 신문지상에 오르던 인물이었다. 헤인스가 자신의 주급을 올려 달라고 요구하자 트린더 회장이 이렇게 약속했다.
“최대 주급제가 없어지면, 너에게 매주 100파운드를 주겠다.”
당시로서는 정말 통 큰 약속을 한 것이다. 하지만 아마 트린더 회장은 당시 공고했던 최대 주급제가 설마 깨지겠냐는 생각에 당시 최대 주급의 다섯 배를 부르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헤인스가 중심이 된 프로선수협회(PFA)가 얼마 안 가 정말로 최대 주급 20파운드라는 영국 클럽의 카르텔을 깨버리고 말았다. 제도가 유명무실해지자, 트린더 회장은 자신이 뱉은 말을 책임져야 했다. 세간의 주목받길 원하는 트린더 회장이 자칫하면 거짓말쟁이가 될 상황에 처했으니 약속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헤인스가 순식간에 다섯 배나 많은 주급을 받게 된 이유다.
헤인스의 일화는 프로축구 선수들의 권익 보호에 굉장한 의미를 부여한다. 100파운드도 그리 큰돈이라 볼 수는 없지만, 어쨌든 선수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켜 정당한 보수를 받게 된 사실상 첫 사례가 됐다는 점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헤인스가 없었더라면 프로축구계 선수들의 권익 발전은 적어도 십수 년은 더디게 나타났을지 모르며, 천문학적 금액이 오가는 지금의 프로축구계 역시 없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프로축구 선수들이 보다 윤택한 경제적 삶을 살게 된 토대를 깔아준 인물이었다. 헤인스는 풀럼의 레전드이기도 하지만, 전 세계 프로축구 선수들의 영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