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은 풀럼 팬들의 몫이었다
맨체스터 국립 축구 박물관을 방문하는 축구 팬들이라면 십중팔구 이 동상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이게 뭐냐”라고 박장대소할 것이다. 축구와는 도저히 관계가 없을 법한, 좀 더 직설적으로 하면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에 있다는 명예의 거리에 있어야 할 물건이 축구 박물관에 떡 하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당장이라도 관람객을 바라보며 빌리 진을 부를 것 같은 그 동상의 주인공은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다.
대중음악사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전 세계인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잭슨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동상의 주인공이 되는 건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음악과 관계된 곳이라면 전 세계 곳곳에 세워져도 이상할 게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왜 이 동상이 축구판에 떡하니 등장했을까? 여기에는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1997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역사적인 사건을 겪게 된다. 바로 해외 자본가의 유입이 시작된 해이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로만 아브라모비치·만수르 알 나얀 등 전 세계에서 돈 좀 만지는 갑부들이 마치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갖추고 있는 잉글랜드 축구 클럽 경영권이지만, 그때만 해도 그렇지 않은 분위기였다. 잉글랜드 클럽 축구는 잉글랜드인들만의 것이었다. 외부의 백만장자에게 클럽의 미래를 맡기는 건 지난 역사와 전통을 팔아넘기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 흐름을 바꾼 게 바로 이집트의 억만장자 모하메드 알 파예드다. 최고급 백화점으로 유명한 런던 헤로즈 백화점의 소유주이기도 했던 알 파예드는 1997년 런던을 연고로 하는 풀럼의 경영권을 매입하며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구단주라는 기록을 갖게 됐다.
당시 전 세계의 수많은 언론들은 알 파예드의 풀럽 매입을 굉장히 의미 있게 바라봤다. 10년 전만 해도 낙후되고 폭력적이라는 이미지가 가득했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가 상업적 가치를 인정받는 상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클럽 창단 후 정상권과는 늘 거리가 멀었던 풀럼 축구 팬들도 그의 재력에 큰 기대를 걸었음은 두말할 것 없다.
하지만 알 파예드가 풀럼을 사들인 이유는 단순히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구단주 재임 기간 풀럼이 아브라모비치나 만수르처럼 리그 판도를 바꿀 만치 주머니 속 쌈짓돈을 풀지는 않았다. 사실 알 파예드는 막대한 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주류 사회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재벌이었다.
알 파예드가 영국에 정착한 게 1980년대의 일인데, 그때까지 영국 곳곳에 다양한 분야에 투자하며 영국 사회의 주류에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굉장히 차가웠다. 심지어 오랜 영국 체류 생활에도 불구하고 시민권도 얻지 못했었다.
그의 아들 도디와 연관된 일도 알 파예드에게는 악재였을 것이다. 도디는 파파라치의 추격 때문에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게 된 다이애나 前 왕세자빈의 새 애인이었다. 도디 역시 그 사건 현장에서 다이애나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알 파예드를 바라보는 영국 내 시선은 더 차가워졌다. 공교롭게도 알 파예드가 풀럼을 사들인 그해 다이애나 비가 사망했다. 영국 사회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을 돌리기 위해,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축구에 손을 댄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물론 정말 사랑받으려면 구단주로서 올바른 처신을 해야 했다. 하지만 알 파예드는 그렇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잭슨 동상이 이를 상징한다. 이 동상은 2009년 6월 25일 잭슨이 사망한 후 풀럼의 홈구장 크레이븐 코티지에 설치됐었다.
알 파예드는 절친한 친구이자 전 세계 음악 팬들의 우상이었던 잭슨을 기리기 위해 이 동상을 클럽 최고의 레전드 조니 헤인스 동상 바로 옆에 세웠다. 본래 이 동상은 헤로즈 백화점 내에 설치될 예정이었으나, 자신과 함께 풀럼의 홈경기를 자주 보며 클럽에 애정을 보였다는, 아무리 생각해도 얄팍한 핑곗거리를 내세우며 크레이븐 코티지로 행선지를 바꾸었다.
물론 그 말에 동조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풀럼 팬들이 경악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헤인스의 미망인은 “내 남편 동상을 네버랜드(註: 마이클 잭슨의 개인 저택)에 놓겠다는 것과 뭐가 다르냐”라고 강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물론 풀럼을 제외한 나머지 팬들이 보기에는, 시쳇말로 완전 ‘팝콘각’이었다. 이보다 놀려먹기 좋은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에 소개된 스토크 시티 팬의 발언이 압권이다.
이제 풀럼의 골키퍼들도 반짝이는 장갑을 착용해야 하지 않겠나?
이 정도로 비난에 시달릴 정도면 굽힐 줄도 알아야 할 터인데, 알 파예드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2013년 샤히드 칸에게 경영권을 내주고 구단을 완전히 떠날 때까지도 잭슨 동상을 폐기하지 않은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2013년 2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크로아티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친선전이 벌어졌던 크레이븐 코티지에서 이 동상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헤인스 동상 옆이 아니라 구장 뒤쪽 팬들이 모이는 작은 광장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쨌든 구장 대문에는 없긴 했으나, 잭슨 동상은 그때까지만 해도 굳건하게 크레이븐 코티지를 지키고 있었다.
알 파예드는 이 동상에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팬들이 당장 철거하라고 한창 목소리를 높이던 2011년에는 아예 풀럼 서포터들을 향해 “지옥에나 가라”라고 저주까지 퍼부었다니 말 다 했다. 풀럼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극혐’일 수밖에 없었던 이 동상은 결국 2013년 9월에야 철거가 됐는데, 2013-2014시즌 풀럼이 2부 리그로 강등을 당하자 “내가 떠난 후 잭슨 동상을 철거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했다.
풀럼이 가진 행운의 상징이자, 팬들이 열광할 만한 환상적인 동상이었다는 게 알 파예드의 주장이다. 무속인들이나 할 법한 이러한 주장을 두고 다른 팬들은 ‘잭슨 동상의 저주’라고 배를 잡고 웃기도 했다. 풀럼 팬들은 부글부글 속이 끓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크레이븐 코티지에서 쫓겨난 이 동상이 맨체스터 국립 축구 박물관에 정중히(?) 모셔졌다. 알 파예드가 이 박물관에 기부하는 형태로 이전한 것이다. ‘축구 종가’를 대표하는 최고의 축구 박물관인 맨체스터 국립 축구 박물관이 축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 물건을 받아들인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럴 때는 개인적 감상이 가장 정확할 듯하다. 진지하게 다루기보다는, ‘프리미어리그에서 이런 일도 있었답니다. 깔깔깔’ 하고 웃어넘기는 코너로 비쳤다. 잭슨의 동상은 여기서도 웃음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