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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Mar 24. 2020

축구계 최초의 셀러브리티

'엘 비틀' 조지 베스트

함부르크 리퍼반에 자리한 비틀즈플라츠 조형물과 광고 @풋볼 보헤미안

영국의 전설적 록 그룹 비틀즈의 첫 히트 싱글이자 그들의 첫 빌보드 차트 1위 곡인 I Want To Hold Your Hands의 뮤직비디오는 지금 봐도 꽤 흥미롭다. 1964년 미국의 유명 TV쇼였던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한 비틀즈의 공개홀 쇼를 편집한 영상인데, 흥겨운 멜로디에 잔뜩 신나 있던 존 레논의 열창에 시선을 빼앗겨선 안 된다. 간주 사이를 가득 메우는 소녀 팬들의 함성, 그리고 자지러지는 듯한 그들의 모습에 더 주목해야 한다. 


비틀즈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같은 근엄한 표정과 굵은 목소리로 무대를 휘어잡는 스탠다드 팝의 세상이었다. 물론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흥겨운 리듬에 춤을 추며 한 시대를 풍미한 록스타가 큰 사랑을 받은 적도 있긴 해도, 대체로 세상 사람들이 흥얼거리며 즐기는 음악에 나름의 품격을 요구하던 시절이었다. 


록 음악은 그저 철없는 아이들의 반항끼 가득한 음악 놀이 혹은 그 또래들이나 즐기던 삼류 음악 정도라는 인식이 많았다는 얘기다. 하다못해 프레슬리마저도 ‘시대의 풍운아’로 불리지 않았는가? 하지만 비틀즈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대중 음악가기도 하지만, 모두에게, 특히 오선지에 골치 아프게 흩어져 있는 음표 따위는 전혀 알지를 못하는 소녀 팬들에게도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던 ‘워너비’였다. 그 소녀들은 신명 나는 음악은 물론 곱상하게 생긴 영국 청년들의 매력에 홀딱 반해 있었다. 때문에 I Want To Hold Your Hands의 뮤직 비디오 속 소녀들은 결코 연출이 아니다. 에드 설리반 쇼 실황을 지금 시각에 맞게 재편집한 이 영상 속 소녀들은 뮤직 비디오의 흥겨움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당시 세계를 뒤흔들었던 ‘비틀즈 이펙트’를 증명하는 역사적 사료다. 


이 소녀들의 애정 덕에 비틀즈는 역사에 남을 만한 희대의 밴드로 남을 수 있었다. 요샛말로 ‘셀러브리티’라 불린 비틀즈는 록 음악의 대중화를 주도했다. 지금도 전 세계 대중음악의 음악적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비틀즈의 이름을 꼭 찾아볼 수 있을 정도 대중음악사 속의 위상도 어마어마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비틀즈는 이 소녀들과 함께 그들이 속한 세계의 풍토를 바꿨다. 그래서 그들은 위대하다.

경기 중 휴식을 취하고 있는 1960년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 이번에는 저 등번호 7번에 관한 얘기를 풀어갈 생각이다. @풋볼 보헤미안

어깨너머로 알고 있는 비틀즈의 위상을 어설프면서도 장황하게 축구팬들에 소개한 이유가 있다. 현재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축구 인기의 원동력은 어디서 왔을지에 관한 고찰이다. 지금의 이 인기는 과연 온전히 축구라는 스포츠, 혹은 이 종목에 몸담은 선수들의 필드 위 실력만으로만 만들어 낸 것일까? 


분명 축구라는 스포츠는 매력적이다. 한두 골 정도로는 끝까지 승부를 예측할 수 없고, 골을 둘째치고 90분 동안 치열하게 기싸움을 벌이는 그 스릴감도 정말 짜릿하다. 선수들이 눈을 홀리는 개인기를 발휘해 팬들을 즐겁게 하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팬들에게 강한 소속감을 부여하는 축구 특유의 매력도 인기 요소임은 틀림없다. 게다가 다른 구기 종목에 비해 쉬운 규칙을 가지고 있어 전 세계에 빠르게 보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축구가 지금처럼 세계 최고 인기 스포츠로 우뚝 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영국 축구는 철도·항만 등 노동자 등 곁에만 가도 쾨쾨한 담배 냄새에 찌든 마초들의 스포츠였다. 여자들이 직접 축구 흥행을 주도했던 딕 커 레이디스라는 사례도 있지만, 그 시절 영국 축구장 내 분위기는 노동 현장에서 땀 흘리며 일한 남자들이 정신적 떼를 박박 벗겨내기 위해 들린 남탕과 같았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축구는 남자들만의 스포츠였고, 그 뿌리 깊은 고정관념은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 남아 있다. 한국에서도 남자들이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를 여자들이 정말 싫어한다고들 하지 않나? 한마디로 축구는 여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없는 놀이였던 셈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슈퍼 레전드이자 셀러브리티, 조지 베스트 @풋볼 보헤미안

하지만 1960년대에 접어든 후 이 기류가 변하게 된다.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건너온 한 더벅머리 미소년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니폼을 입으면서 세상이 변했다. 이 선수는 환상적인 개인 기량으로 남성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음은 물론 곱상한 외모로 여성 팬들의 마음까지 빼앗아버렸다.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레전드 조지 베스트를 두고 하는 말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슈퍼스타를 뜻하는 등 번호 7번 전설의 시작점이자 개인기와 득점력으로는 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이상으로 대단했다는 베스트의 실력은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다. 귀신같은 몸놀림으로 상대 골망을 뒤흔들었던 그의 기량은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는 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베스트가 시대의 아이콘으로 지금도 기억되는 이유는 그 실력 때문만은 아니다. 남녀 가리지 않고 사랑받았던 베스트 특유의 존재감이 더 크게 작용했다.


베스트는 현역 시절 ‘엘 비틀(El Beatle)’ 혹은 다섯 번째 비틀즈의 멤버로 불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앞서 거론한 비틀즈와 비견할 정도로 인기인이었다는 얘기다. 그저 말뿐인 이야기가 아니다. 수많은 곳에서 그를 찾았다. 


베스트는 축구장은 기본이며 온갖 광고에 출연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보고 싶어 했다. TV 카메라 앞에서 적당히 볼 리프팅을 하며 상품명을 외치는 시시한 광고나 TV 프로그램이 아니라, 여느 연예인과 마찬가지로 스타일리시한 패션과 헤어스타일로 당대의 유행을 주도했다.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멋들어진 선글라스를 착용한 갈깃머리 축구 선수는 어지간한 당대의 연예인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당대의 패션 아이콘이었다. 베스트가 뭔가 하면 그걸 따라 하려는 추종자들이 넘쳐났다. 

맨체스터 축구 박물관에 전시된 조지 베스트 관련 물품들 @풋볼 보헤미안

맨체스터에 자리한 축구 박물관에서 운 좋게 베스트에 관련한 특별전을 접했을 때 당시의 인기를 체험할 수 있었다. 당시 발간됐던 자서전은 물론이며 각종 기념물품은 각종 유니폼이나 축구화 등이 전시되는 다른 축구 선수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베스트의 화보 <George!>의 표지는 여느 연예인의 그것과 비교해 전혀 위화감이 없을 정도였다. 베스트의 사진이 들어가 있다며 광고하는 그 시절 감자칩 과자의 홍보 포스터, 베스트를 전면에 내세운 코트 광고 등도 볼 수 있었다. 지금이야 축구 스타들을 전면에 내세운 광고들을 흔히 볼 수 있지만, 그 시절에는, 정확히 베스트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좀처럼 살펴볼 수 없었던 일이다.


‘셀러브리티’가 된 베스트는 축구계 풍경도 바꿔놓았다. 구단이 주는 주급만 꼬박꼬박 받으며 생활해야 했던 축구 선수가 여러 과외 수입을 받으며 부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축구도 잘하고 외적인 상품성까지 갖춘 선수가 축구만 잘하는 선수보다 돈이 된다는 걸 구단도 알게 됐다. 전체적으로는 이런 선수들을 활용해 경기 외적으로 마케팅을 펼치면 더 큰 호응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요컨대 프로축구가 베스트의 등장 이후 상업성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처럼 잘생긴 축구 선수들, 그리고 그들을 활용한 마케팅은 때론 공격을 받기에 십상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베컴이 한창 축구 경기에서 일어난 일로 자국 내에서 항상 비판을 받을 때 늘 따라붙던 비아냥이 그의 곱상한 외모였다. 안정환도 현역 시절 초기 헤딩을 잘 시도하지 않았던 것 때문에 터무니없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선수의 경기 스타일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단순히 그가 곱게 다듬은 헤어스타일 때문이라는 억측도 있었다. 쓸데없는 비판 때문에 선수, 그리고 그들이 속한 팀이 억울한 피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 어두운 면이다.


그러나 베스트와 같은 성공 사례 덕에 한낱 공놀이에 불과했던 축구가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품을 수 있고, 이전보다 더 나은 여건에 놓일 수 있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어찌 보면 비틀즈가 대중음악계에서 그랬듯, 베스트 역시 축구계를 바꾸어놓았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조지 베스트는 생전에 자동차 브랜드 미니 마니아였다. @풋볼 보헤미안
George Best’s Mini
Manchester United legend George Best was football’s first celebrity superstar. He was also a car enthusiast, seen posing here in 1969 in his brandnew Mini. Outwardly, it seemed that Best had an idyllic life, enjoying spending his money on partying and cars.
But fame, fortune and the ever-present public eye put huge pressure on him and public eye put huge pressure on him and his family. While the football stars of today have support to cope with these pressures, Best turned to alcohol.
His passion for car – particularly Minis – continued until his death. Best bought this Mini in 2002 and drove it until he was banned for drink driving in February 2004.
베스트가 2004년까지 운행했다는 미니 @풋볼 보헤미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전설 조지 베스트는 축구계 첫 번째 셀러브리티였다. 또한 유명한 자동차 마니아였으며, 1969년에는 그의 신차가 된 미니에서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 외형적으로 베스트는 소박한 삶을 살았고, 그는 자신의 돈을 써가며 파티와 차를 사는 걸 즐겼다. 그러나 그의 명성과 재산은 수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으며, 그와 그의 가족을 크게 압박했다. 지금의 축구 스타들은 이러한 주변의 압박에 대처할 수 있도록 관리를 받지만, 베스트는 그렇지 못했다. 베스트는 알코올에 의존했다. 자동차, 특히 미니에 대한 베스트의 애정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됐다. 2002년에 이 미니를 샀으며, 지난 2004년 2월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될 때까지 이 차를 끌고 다녔다.

그런데 정작 베스트는 이런 스포트라이트에도 불구하고 불우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는 것이 안타깝다. 위의 조지 베스트의 ‘애마’였던 미니에 관한 소개 문구에서 지적하듯, 지금 축구 선수들은 에이전트 혹은 연예기획사의 철저한 관리를 받으며 자신의 대외적 이미지를 구축한다. 하지만 베스트는 그렇지 못했다.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미디어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아 피곤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그 스트레스를 술과 음주운전 등 온갖 기행으로 풀었다. 한때 축구 천재였던 그는 나이가 들수록 문제아적인 인생을 살아야 했다.


물론 아무리 힘든 인생을 살아도 그런 선택을 했던 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축구계 최초 셀러브리티였기에 짊어져야 했던 인생의 멍에 역시 지금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이해를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지금 세대 선수들처럼 관리를 받았다면 리오넬 메시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이상 가는 위상을 가진 선수가 됐을지도 모른다. 베스트는 지난 2005년 11월 25일 향년 69세의 일기로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은 베스트는 현재 영국에서 불멸의 축구 아이콘으로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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