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 축구장 참사에 대한 이야기
영국으로 오기 전 브뤼셀을 들렀었다. 브뤼셀 체류 시간이 채 스무 시간도 되지 않았기에, 사실상 유로 스타를 타기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 여기고 찾아간 곳이었다. 넉넉지 않은 시간을 쪼개어 킹 보두앙 스타디움을 찾았다.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의 홈으로 쓰이는 이 장소를 찾아간 건, 미안하지만 벨기에 축구에 대한 궁금증 때문은 아니었다. 킹 보두앙 스타디움은 축구의 슬픈 역사가 자리한 곳이다. 이곳에는 다른 이명이 있다. 바로 ‘헤이젤’. 그렇다. 축구 역사상 가장 끔찍한 참사를 논할 때 늘 거론되는 그 헤이젤 참극의 현장이다.
헤이젤 참사는 경기장 사고에 대한 고정관념을 전 세계에 심어놓았다. 몽둥이와 돌멩이를 든 관중들이 스탠드를 뛰어다니며 상대 팀 팬들을 공격하고, 그 난리 통에 스탠드가 붕괴되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장면이 가감 없이 송출됐으니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게 이상한 노릇이다.
4년 후 힐스브로 스타디움에서 철창을 기어오르는 리버풀 팬들의 모습도 그랬다. 마가렛 대처 당시 영국 총리가 이끌었던 영국 정부 역시 헤이젤에서 난동을 부려 93명이라는 귀중한 삶을 앗아간 리버풀 팬들이 힐스브로 참사의 원인이라고 지목하기도 했다. 관중 난동은 곧 경기장 참사, 난동을 부리는 팬들은 훌리건이라는 공식이 대중들의 뇌리에 박힌 결정적 사건이다.
하지만, 그릇된 판단이다. 글래스고·맨체스터·리버풀을 돌아다니며 관중 난동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접했다. 힐스브로 참사 이전까지 영국 내에서 관중 난동이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레인저스의 아이브록스 스타디움과 힐스브로 참사로 고통받았던 리버풀의 안필드는 여전히 아픔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맨체스터에 자리한 축구박물관에서도 영국 내에서 일어난 각종 축구장 사고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찬찬히 살펴보면서 내린 판단은 의외로 흥분한 관중이 아닌 부실했던 시설 때문에 일어난 사고가 더 잦았다는 것이다.
1950 FIFA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이 벌어졌을 때 리우 데 자네이루의 이스타지우 지 마라카냥에 1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렸다던가, 축구 경기장 담벼락에 엉덩이를 걸터앉은 모습이 밖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비쳐 ‘꾸레’라는 별칭으로 불렸다는 바르셀로나 팬들의 일화는 왠지 훈훈하게 느껴진다.
입추의 여지가 없는 관중석도 모자라 난간에 아등바등 매달려서라도 경기를 보고 싶은 팬들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열광적이다. 멀리 해외 사례까지 찾을 필요도 없이 한국에서도 20~30년 전만 해도 티켓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외벽과 나무에 기어 올라 경기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하지만 안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위험천만한 짓이었다. 1971년 아이브록스 참사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안전불감증이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 1971년 1월 2일,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에서 레인저스와 셀틱의 ‘올드 펌’ 더비가 펼쳐졌다. 역사적 이유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라이벌전 중 하나로 불리는 올드 펌은 과거에는 박싱 데이 혹은 새해 연휴 기간에 연례행사처럼 치러졌다. 서로 으르렁거릴 수밖에 없는 경기긴 해도, 이견의 여지가 없는 매머드 스포츠 행사였던 만큼 되도록 많은 팬들이 현장을 찾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이 경기는 큰 화를 불렀다.
사고의 전조는 1961년에 있었다. 스타디움과 외부를 연결하는 13번 계단이 무너져 내려 두 명이 사망한 적이 있다. 사망사고는 아니지만, 팬들이 다친 사고가 1967년과 1969년에도 있었다. 사람이 많이 죽지 못해서, 혹은 그냥 있을 수 있는 가벼운 사고로 치부했을지 모르겠다. 허나 아이브록스는 1961년 사망 사고 이후 계속 경보음을 내고 있었다.
그 경보음을 무시한 대가가 바로 1971년 아이브록스 참사다. 셀틱의 레전드 공격수 지미 존스턴에게 내준 실점 때문에 패배 직전에 몰려 있던 레인저스의 팬들이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며 경기장 밖을 나가고 있었다. 그때 경기 종료 직전 레인저스의 공격수 콜린 스테인의 극적 동점 골이 터졌다. 터덕터덕 계단을 따라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팬들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던 팬들이 지른 환호성에 깜짝 놀라 일시에 경기장으로 돌아오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사람들이 몰려 있던 13번 계단에서 큰 혼란이 빚어졌다. 경기장을 나가던 사람과 다시 돌아가던 사람이 좁은 공간인 계단에서 뒤엉키기 시작했고, 급기야 하중을 견디지 못한 난간이 무너져 내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깔리거나 추락해 사망했다. 무려 66명이 목숨을 잃었고, 다친 사람은 200여 명에 이른다. 이 사고는 1989년 힐스브로 참사 이전까지 영국 내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축구장 참사인데, 모자랐던 시민 의식도 문제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계단을 부실 공사한 탓이 더 컸다.
무려 96명이나 목숨을 잃어 리버풀 팬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상처로 남은 힐스브로 참사도 마찬가지다. 힐스브로 참사 영상을 보면 팬들이 철창을 기어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당대에는 피치 안으로 들어가 난동을 부리기 위한 몹쓸 훌리건들의 행동으로 포장됐다. 하지만 좁은 공간에 끊임없이 몰려드는 인파를 피해 목숨을 구하고자 한 행동이었다. 즉, 스탠드 수용 규모를 초과하는 사람들을 경기장에 입장시킨 안전 관리 요원과 경찰의 미숙한 현장 관리가 원인이었다.
사실 힐스브로 참사는 막을 수도 있었다. 1946년 볼튼 원더러스의 홈 번든 파크에서도 같은 이유로 33명이 목숨을 잃는 일이 있었고, 1971년 아이브록스 참사도 경기장 내부가 아닐 뿐 외부의 좁은 계단에서 사람들이 몰려서 일어난 사고였으니 사실상 같은 이유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같은 원인의 사고가 반복됐지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영국은 그저 단순히 과열된 응원 열기 때문에 일어난 일로 치부해버렸다.
황당한 사고도 있었다. 1985년 브래드포드 AFC의 홈구장 밸리 퍼레이드에선 축구팬이 무심코 버린 담배꽁초 때문에 경기장이 홀랑 타버리는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에는 관중석 내 흡연이 가능했는데, 이 사고 때문에 56명이 사망했다. 언뜻 흡연자의 부주의에 의한 사고로 볼 수 있으나, 그게 사고의 원인 전부는 아니다. 당시에는 니스칠이 범벅이 된 목재 스탠드로 이뤄진 경기장이 무척이나 많았다. 불씨가 살은 꽁초는 인화성이 컸던 목재 스탠드와 뒤엉켜 큰 불이 되고 말았다. 이 사고 역시 경기장 내 환경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면 막을 수 있었다.
지금 프리미어리그가 벌어지는 영국 내 스타디움은 걸핏하면 반복됐던 축구장 참사에 대한 원인 규명을 통해 만들어진 경기장이다. 수사관 피터 테일러는 1989년 힐스브로 참사가 벌어진 후 축구장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철저히 파헤친 보고서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 관중들의 압사를 막기 위해 좌석식 스탠드를 도입하고 스탠드와 피치 사이의 철창을 없앴다. 화재를 막기 위해 목조 스탠드를 철골 스탠드로 모두 바꿨으며, 경기장 내 안전 수칙을 모조리 바꿔 사고 가능성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현재 전 세계에 적용되고 있는 안전 수칙이 바로 이 보고서를 기초로 만들어졌다. 이 보고서가 바로 현재 축구장 안전 수칙의 ‘바이블’로 유명한 테일러 리포트다.
영국에서 일어난 각종 참사에 대한 추모, 그리고 그 속에 숨은 이야기와 원인을 살피면서 다시 한번 갑갑함이 느껴졌다.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해 아무 죄가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야 했는지에 대한 안타까움 들어서다. 지금 축구 팬들은 떠나간 이들의 희생 위에서 축구를 즐기고 있다. 그리고 같은 잘못을 절대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책무를 짊어지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전 세계의 모든 축구 팬들은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