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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Mar 23. 2020

그거 아니?
안필드는 본래 리버풀 홈이 아니야

에버턴 초대 회장, 그리고 리버풀의 아버지 존 하울딩 이야기

리버풀의 안방 안필드 @풋볼 보헤미안

안필드는 축구 팬들에게는 성지인 곳이다. 잉글랜드 축구 클럽 중 가장 거대한 성공을 거둔 리버풀의 안방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축구 선수들이 이곳을 발판으로 세계적인 스타로 우뚝 섰으며, 그 스타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백수 십 년간 대를 이어가며 지켜본 현지 팬들의 유별 난 사랑 역시 유명하다. 


경기 전 팬들이 부르는 You Will Never Walk Alone도 빼놓을 수 없다. 비단 리버풀뿐만 아니라 셀틱·페예노르트·아약스·보루시아 도르트문트·FC 도쿄 등 전 세계에 걸쳐 수많은 축구 팬들이 애창하고 있는 이 곡의 고향이 바로 안필드다. 그래선지 안필드에 발을 디뎠을 때 그 기분은 왠지 모르게 특별했다. 딱히 리버풀 팬은 아니긴 해도, 마치 예루살렘이나 메카를 방문한 신자들이 품었을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기도 하다.


1884년 9월 개장한 안필드 안팎을 거닐며 모든 게 인상적이고 스토리가 담겨 있다는 것을 자연스레 느끼게 됐다. 라이버 버드가 상단에 새겨진 빌 샹클리 게이트, 그 게이트와 더불어 안필드의 대문 구실을 하는 밥 페이즐리 게이트를 통해 리버풀 역대 최고 명장에 대한 헌정을 느낄 수 있었다. 


케니 달글리시·스티븐 제라드 등 리버풀이 사랑해마지 않는 레전드를 위한 기념비를 찬찬히 돌아보며 안필드를 뜨겁게 달구었던 그들의 플레이를 머릿속으로 상상했으며, 그 맞은편에 자리한 힐스보러 축구장 참사에 대한 추모비를 보며 여전히 상흔으로 남아 있는 그 사건에 대한 리버풀 팬들의 착잡한 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됐다. 


물론 경기장 속에도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상당히 많다. 훗날 이곳을 방문하게 될 수많은 한국 축구 팬들을 위해 모두 다 설명하지 않겠지만, 딱 하나만큼은 소개하고 싶다. 경기장으로 통하는 터널로 향하는 현관문 상단에 붙어 있는 THIS IS ANFIELD 표지판이다. 

리버풀 선수들은 경기장 입장 전 이 표지판을 손으로 가볍게 터치하는 의식을 하는 게 오랜 전통이다. 이 표지판은 리버풀의 역대 최고 명장 샹클리 감독의 아이디어에 의해 탄생했다. 생전에 샹클리 감독은 “선수들에게 우리가 누구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인지, 상대에게는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를 싸우고 있는지를 알리고자 설치했다”라고 이 표지판을 만든 이유를 설명했다. 


별거 아닐 수 있으나, 주변 환경 조성을 통해 휘하에 둔 선수들이 가진 능력을 모두 쏟을 수 있도록, 반대로 상대가 리버풀 선수들과 팬들을 보고 오금이 저릴 수 있도록 했다는 얘기다. 한 시대를 풍미한 명장다운 리더십의 표출이다.


어쨌든 이처럼 흥미진진한 히스토리가 곳곳에 베여 있는 곳이 안필드다. 그런데, 이 황홀한 감상을 단번에 깨뜨릴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마치 아이들에게 “사실 산타는 없다”라고 외치며 동심 파괴하는 나잇값 못하는 못된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지만, 부인할 수 없는 팩트다. 사실 이곳 안필드, 본래 리버풀의 안방이 아니다. 리버풀의 머지사이드 라이벌 에버턴의 본거지였다. You Will Never Walk Alone이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안필드의 풍경이 익숙한 이들에게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싶겠지만, 안필드가 원래 에버턴의 아지트였다는 흔적 역시 곳곳에 남아있다. 


이렇게 꼬인 역사는 힐스보러 참사 추모비에서 머잖은 곳에 자리한 어느 동상의 주인공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진성’ 리버풀 팬들도 알아보지 못하고 스칠 듯한 그 동상의 주인공은 존 하울딩, 리버풀을 탄생시킨 아버지다. 그러면서도 에버턴의 회장 출신이기도 하다. 라이벌 에버턴 회장 출신 리버풀의 아버지라니, 알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은 것 같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이처럼 복잡하게 뒤엉킨 그의 이력에는 집주인과 세입자의 치열한 다퉜던 사연이 숨어 있다.

리버풀의 창립자이자 에버턴의 초대 회장 존 하울딩 흉상 @풋볼 보헤미안

1879년 창단한 에버턴은 1888년 리버풀 지역에서 유명한 사업가이자 리버풀 시장이기도 했던 하울딩을 초대 회장으로 영입한 후 급속도로 빠르게 성장해나갔다. 경영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영특했던 하울딩의 노하우는 에버턴이 빠르게 리그의 강호로 성장하는 데 보탬이 됐다. 에버턴이 번듯한 홈구장을 가지게 된 것도 하울딩의 노력 덕분이다. 


본래 에버턴은 리버풀 북부 지역에 있는 스탠리 공원 속에 자리한 프리어리 로드라는 작은 경기장에서 뛰었다. 그러나 1884년 땅 주인의 갑작스러운 퇴거 요구 때문에 갈 곳을 잃었고, 이때 하울딩이 나서 에버턴을 구해주었다. 양조업자 존 오렐이 소유했던 안필드를 새로운 홈으로 쓰게끔 한 것이다. 오렐은 하울딩과 오랜 친분을 생각해 굉장히 싼 임대료로 에버턴에 안필드를 내주었다. 


당시 시점으로 새 경기장이었던 안필드였기에 에버턴 처지에서는 대만족일 수밖에 없다. 에버턴은 안필드 입성 후 첫 경기였던 얼스타운 FC와 경기에서 5-0으로 대승하며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지역 강팀으로 우뚝 서며 1888년에는 잉글랜드 풋볼 리그(프리미어리그의 전신) 창립 멤버로도 가입하게 됐다. 에버턴은 매 경기 8,000여 명의 관중을 모으며 리버풀 최고의 인기 팀이 됐다. 하울딩은 이러한 에버턴의 성공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1888년에 클럽의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러한 성공은 아이러니하게도 하울딩이 다른 마음을 품게 하는 이유가 됐다. 1891년 오렐에게서 안필드를 완전히 매입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매몰찬 태도를 보였다. 하울딩은 1889년에는 100파운드, 1890년에는 250파운드, 1891년에는 370파운드에 달하는 안필드 임대료를 매겼다. 에버턴은 매해 어마어마한 임대료 인상을 요구받은 것이다. 심지어 선수들에게는 숙소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소유한 샌든 호텔에서 생활할 것을 요구했다. 지금도 리버풀 오크필드 거리에 자리하고 있는 이 호텔에 선수들을 반강압적으로 밀어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숙박비를 꼬박꼬박 받았다.

하울딩은 지금의 안필드를 통해 에버턴을 상대로 막대한 부동산 수익을 올리려 했다. @풋볼 보헤미안

하울딩이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한 이유는 막대한 부동산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많은 임대료를 거듭해서 올리면 이를 견디지 못한 에버턴이 차라리 안필드를 사버릴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안필드에서 성공 가능성을 확인한 에버턴이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없다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만약 에버턴이 안필드를 사버렸다면, 하울딩은 어마어마한 거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마치 칠면조를 공들여 키워 살 찌운 후 추수감사절에 잡아먹는 것처럼, 에버턴을 상대로 제대로 한탕하려고 했던 셈이다.


에버턴은 완전히 다른 판단을 내렸다. 1892년 안필드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에버턴 역시 영리했다. 안필드를 쓸 수 없다면, 안필드와 최대한 가까운 자리에 새 구장을 만들면 그뿐이었다. 당시에는 영국 내 축구 인기가 폭증함에 따라 아치발드 리치 등 위대한 축구 경기장 전문 건축가들이 득세하던 때였다. 


자연히 영국 곳곳에 축구 경기장이 신축되고 있었고, 건설 비용도 그만큼 싸졌다. 요컨대 하울딩이 팔아치우려했던 안필드의 매매가와 새로운 경기장 신축 비용이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에 에버턴은 새로 경기장을 짓기로 했다. 아예 영국 최초의 축구 전용경기장을 만들었다. 안필드와 걸어서 10분도 되지 않는 곳에 자리한 구디슨 파크, 바로 지금 에버턴의 안방이다.

에버턴은 하울딩의 몽니를 피해 새로운 구장으로 이사갔다. 안필드에서 불과 2km 떨어진, 바로 구디슨파크다. @풋볼 보헤미안

발등에 불이 떨어진 쪽은 이제 하울딩이었다. 안필드가 당시 최고 시설을 갖춘 축구경기장이었지만, 그곳을 쓰는 팀이 없으면 그저 흉물스러운 건물에 불과했다. 에버턴이 떠난 후 텅 빈 안필드에서는 막대한 손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에 하울딩이 떠올린 아이디어가 실로 기발했다. 축구팀이 떠났다면, 축구팀이 사라졌다면, 대신할 축구팀을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탄생한 클럽이 바로 지금의 리버풀이다.


물론 팀명이 처음부터 리버풀은 아니었다. 하울딩은 리버풀 지역의 선두주자였던 에버턴의 후광을 이용하려 했다. 리버풀의 본래 팀명이 에버턴 애슬래틱이었던 이유다. 하지만 그 노림수를 알아챈 FA(잉글랜드축구협회)가팀명 승인을 거부했다. 결국 완전히 새로운 팀명을 찾아야 했다. 평범하게 도시명을 클럽의 이름으로 삼은 이유다.


이러한 역사의 흔적이 리버풀의 박물관 속에서도 그대로 숨김없이 자리하고 있다. 리버풀의 초창기 역사를 설명하는 코너에는 “리버풀이 에버턴을 대신하게 됐다. 안필드는 1884년부터 1892년까지 에버턴의 홈이었으며, 이곳에서 에버턴은 1888년 9월 24일 얼스타운 FC를 상대로 5-0으로 승리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명판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안필드를 누볐던 에버턴 선수들이 입었던 에버턴 유니폼도 깔끔하게 보존되어 있다. 

리버풀 박물관에 자리한 에버턴의 명판과 당시 에버턴 유니폼 @풋볼 보헤미안

붉은 제국의 중심부에서 푸른색의 에버턴을 느낄 수 있다니, 이보다 두 클럽의 뿌리가 본래 같았다는 걸 상징적으로 알리는 게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하울딩은 에버턴 처지에서는 배신자로 기억될 수 있는 인물이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에버턴에 막대한 돈을 강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영겁의 세월이 지나면, 의도가 어떠했든 결과가 좋으면 미화가 될 수도 있는 모양이다. 


앞서 소개한 하울딩의 동상은 지난 2018년에 제막됐다. 당시 리버풀 지역 축구협회 회장은 “하울딩이 없었다면 머지사이드의 축구는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분명 하울딩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프리미어리그에서 리버풀과 에버턴이라는 훌륭한 클럽의 경기를 지켜보며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 리버풀 지역 축구의 아버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면에 자리한 ‘쩐의 전쟁’은 둘째치고 말이다.

안필드의 상징 샹클리 게이트. @풋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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