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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Oct 23. 2021

그냥 길을 특별하게 만드는
스토리의 마법

레알 마드리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거닐면서 남긴 단상

레알 마드리드의 안방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풋볼 보헤미안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이제 축구 경기장이 아닌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된 듯하다. 스타들의 워너비 클럽이라 불릴 정도로 그 위상이 가히 유럽 최고라 할 수 있는 레알 마드리드의 안방이라 그런지 매치 데이는 물론 그렇지 않은 날에도 이곳에는 늘 사람이 붐빈다.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방문했던 그날은 경기장 주변에서 유달리 중국인 관광객들을 많이 봤던 것 같다. 경기장 정문에 일렬로 쭉 늘어선 대형 버스들은 유럽 곳곳을 누비고 있는 중국인 관광객들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고 있었다. 물론 전 세계 곳곳에서 모인 다른 나라의 축구 팬들도 제법 많긴 했지만, 관광적 측면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다. 그래선지 경기장 주변 잡상인들도 대목 분위기였다.      


볼썽사나운 모습도 봤다. 경기장 주변에는 미키마우스 탈을 쓴 사람들이 팬들에게 접근해 사진 촬영하자고 유혹한 후 돈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쩌면 변한 게 하나도 없을까 싶은 생각이 들지만, 일단은 차후 이곳을 찾을 이들을 위해 이들과 어울리지 말라는 소소한 팁을 이곳에 남기려 한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x폼잡기 ㅡ.ㅡa @풋볼 보헤미안

아, 사실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2013년 2월 2012-2013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1라운드 레알 마드리드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맞대결을 이 경기장에서 지켜봤다. 그것도 VIP 박스에서 유럽을 대표하는 두 팀의 치열한 맞대결을 지켜봤는데, 기억이 맞다면 그 경기에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대니 웰백이 각각 한 골씩 넣었던 것 같다. 추억을 좀 더 되새겨보자면, 슈퍼스타들의 대결보다는 경기를 앞두고 만끽했던 주변 분위기가 더 기억에 남는다.     


킥오프 12시간 전부터 경기장 주변에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경기장 인근 펍에서 잔뜩 맥주에 취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이 난동에 가까운 사전 축제를 벌이기 시작했다. 주변 도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이 흘린 맥주로 뒤범벅이 되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저녁이 이르자 일과를 마치고 경기장으로 달려온 레알 마드리드 팬들도 도로를 점거하고 뜨겁게 응원했는데, 서로 목청껏 응원가를 부르며 다가올 대결을 기다리는 모습에 나 역시 흥분했었다. 거리에서 무려 반나절을 돌아다녀 몸이 꽤나 피곤했지만, 인생을 살면서 피로보다 즐거움이 더 컸던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매치 데이 때 주변 분위기는 대략 이렇다. 참고로 노상 음주는 스페인에서는 불법. @풋볼 보헤미안

그 좋은 경험을 해선지 두 번째 방문 때는 영 흥이 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미 경기장 내 가볼 만한 장소는 대부분 둘러봐선지 투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디다스의 전폭적 지원 속에 운영되고 있는 레알 마드리드 공식 팬샵을 둘러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이곳을 왔을 땐 캐리어 가방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이것저것 샀었는데, 아무리 대단한 것들이라고 해도 처음이 아니다 보니 흥이 나지 않았다.      


솔직히 딴생각만이 가득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대결을 앞두고 경기장 주변 케밥 식당에서 일하던 예쁘장하던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지금도 일하고 있을지 궁금해 그 식당을 다시 찾기도 했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럴 리 없었다.      


그렇게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보다는 그 주변을 돌며 개인적 추억에 빠져드는 것에만 정신이 팔렸었다. 그러던 중 한 내리막길에서 발걸음이 멈추었다.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정문 광장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는데, 원정팀 선수단 버스 통로로 쓰이는 길이다. 그러니까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냥 길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곳에 발걸음이 멈춘 이유가 있다. 이 길에는 사연이 있다. 사나이들의 진한 우정과 의리에 관한 이야기다.     

정말 별 거 없어 보이는 원정팀 선수단 통로, 하지만 이곳에 스토리가 숨어 있다 @풋볼 보헤미안

인터 밀란과 바이에른 뮌헨의 2009-2010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직후의 일이다. 객관적 전력상 우승은 어렵다고 평가받던 인터 밀란이 준결승에서 바르셀로나를 무너뜨리더니, 결승서 바르셀로나 못잖은 막강함을 자랑하던 바이에른 뮌헨에 2-0으로 완승하며 빅 이어를 품에 안았다. 당시 인터 밀란은 조세 무리뉴 감독의 지휘 하에 이미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를 정복한 상태였고, UEFA 챔피언스리그 트로피까지 가져오면서 역대 여섯 번째 트레블 클럽이 됐다.      


그리고 그 바이에른 뮌헨전을 마치고 무리뉴 감독은 전격적으로 레알 마드리드 이적을 발표했다. 클럽 최고의 황금기를 안긴 무리뉴 감독의 드라마틱한 퇴장 선언에 모두가 놀랐는데, 이는 그의 지시를 받고 피치를 누빈 인터 밀란 선수들도 충격을 받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 무리뉴 감독이 팀 내 리더였던 마르코 마테라치와 뜨겁게 포옹하며 이별의 정을 나누던 장소가 바로 이 길이었다. 무리뉴 감독은 우승 기자회견 직후 따로 차량을 이용해 경기장을 떠나던 중이었는데, 마테라치가 내리막길 벽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며 무리뉴 감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무리뉴 감독이 차에서 내려 마테라치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위로했다.     


사실 굉장히 이색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축구계에서 이적은 흔한 일이다. 무리뉴 감독은 당시 세계 최고의 지도자 중 하나였고, 첼시 시절부터 레알 마드리드로부터 세 차례나 영입 제안을 받고도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인터 밀란에서 더 이룰 것이 없는 대성과를 이루면서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상황이 주어졌고, 때마침 러브콜을 한 레알 마드리드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인터 밀란 선수들은 좋은 성과를 낼수록 현실로 다가오는 무리뉴 감독과 이별을 감정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마테라치와 더불어 팀 내 정신적 리더 구실을 했던 하비에르 사네티는 훗날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와 인터뷰에서 “무리뉴 감독이 떠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선수들끼리 그 얘기를 하는 걸 무척 두려워했다”라고 말했다. 자칫 라커룸 분위기를 해칠 만한 일이었기에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확정되기 전까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다는 얘기인데, 최고의 순간에 오르는 순간 정말로 최고의 리더가 떠나게 됐으니 감정이 북받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테라치와 무리뉴 감독의 포옹은 당시 세계적으로 크게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축구계에서 벌어진 일 중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중 하나로 수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그리고 두 남자가 눈물을 뿌렸던 그 길을 실제로 접하니 그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재차 강조하지만, 정말 흔하디 흔한 길에 불과하다. 하지만 두 남자의 눈물이 가득한 스토리를 떠올리니 그 별 것 없어 보이는 길이 특별한 장소처럼 비쳤다. 소소한 일이라도 알면 알수록 얼마든지 특별하게 느낄 수 있다는 세상의 진리를 또 한 번 느끼면서 두 번째로 방문한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조용히 떠났다.

당시 두 남자의 뜨거운 포옹. 유튜브에서 찾아보자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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