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엠블럼 내전
세비야에 자리한 레알 베티스의 홈 베니토 비야마린을 찾았을 때 기억이다. 경기장 주변 전신주에 현지 축구 팬들이 붙인 스티커가 가득 붙어 있었다. 스티커 자체는 그리 특별할 게 아니다. 축구장 중심으로 유럽을 떠돌다 보면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현지인들의 축구 스티커이기 때문이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홈구장 지그날 이두나 파크의 원정석 앞에 설치된 철판에는 원정팬이 붙인 스티커가 가득 붙어 있기도 했다. 대개 그 경기장에 왔다 간다는 인증 용도로 사용된다. 그런데 지금 소개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팬들의 스티커는 좀 달리 보였다.
축구 팬들에게 제법 잘 알려진 사진인 손가락 욕설을 하는 훌리건 꼬마를 차용한 스티커였다. 무심결에 봤을 땐 홈팀 레알 베티스를 도발하기 위한 스티커로 생각하며 발걸음을 뗐다. 그러다 좀 이상하다 싶어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와 천천히 살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엠블럼을 금지하는 표식과 함께 보이콧을 하자는, 즉 상대 팀이 아닌 자신이 응원한 팀을 향해 거칠게 항의하는 스티커였다.
마드리드로 이동한 후,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나 축구와 관련한 장소 인근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스티커를 제법 많이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여기 왔다”라는 흔적을 남기는 게 아닌, 뭔가 조직적으로 이 스티커가 곳곳에 붙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스티커들은 디자인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El Escudo No Se Toca(엠블럼 바꾸지 마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El Escudo No Se Toca!”라는 문구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팬들이 시위성 응원가로 제작되어 불리고 있을 정도다.
솔직히 뭐가 문제인가 싶었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엠블럼이 바뀔 때 팬들의 관심은 예전보다 세련되고 예쁘게 변했는가에 몰린다. 공개된 새 엠블럼이 팬들의 기대에 못 미칠 경우 비판을 받긴 해도, 마치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여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실 의미를 담아 멋지게 바꿀 수 있다면, 엠블럼을 바꾸는 작업은 팬들에게 찬사를 받을 만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팬들은 아예 건드리지 말라고 클럽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한번 얼마나 변했는지 꼼꼼히 따져보겠다. 방패 문양 외곽에 있던 황금선이 사라졌다는 점, 전체적으로 푸른색 느낌이 좀 더 짙어졌다는 점, 가파른 느낌이었던 엠블럼 내 사선의 각도가 완만하게 변했다는 점, 하단에 자리한 로히블랑코(흰색과 붉은색 줄무늬)의 간격이 예전보다 넓어졌다는 점, 딸기나무와 곰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문장에 약간의 수정을 꾀했다는 점이 변했다. 곰은 예전에는 딸기나무 기준으로 오른쪽에 서 있었으나, 지금은 왼쪽으로 옮겼다. 곰의 위치는 예전 엠블럼과 비교해 가장 큰 차이가 나타나는 부위다.
이렇게 설명하니 꽤 많이 바뀐 듯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렇게까지 차이가 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저 J를 형상화한 새 엠블럼을 발표해 논란이 일었던 유벤투스와 비교하면 굉장히 양반이 아닌가 싶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새 문장은 유벤투스의 그것처럼 커다란 이질감은 주지 않기 때문이다.
현지 팬들에게 한번 묻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은 홈구장 이전 때문에 폐가 상태였던 에스타디오 비센테 칼데론을 찾아갔다. 이곳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오랜 팬들이 모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럽이 떠난 옛 집에 모이는 팬들이 많지 않았다. 그저 새 구장으로 오는 법만 알리는 패널만 봤을 뿐이었다.
발걸음을 옮겨 비센테 칼데론에서 17㎞ 떨어진 새 완다 메트로폴리타노로 이동한 후 경기장 외부에서 일하던 현지 인부에게 겨우 단편적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디자인 변화를 거론하며 현지 팬 대부분이 현재 엠블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팬들은 바뀐 엠블럼이 마드리드의 정체성을 도리어 훼손시켰다고 여기는 듯했다.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게 바로 딸기나무와 곰이 소재가 된 엠블럼 속 문장이다. 잠깐 삼천포로 빠져서, 이 문장의 유래를 소개하겠다. 그림으로 표현되지 않지만 곰을 피하고자 딸기나무 가지 속에 있던 소년이 자신을 구하려고 했던 엄마에게 다가오지 말라며 “Madre, id”라 외친 일화를 다룬 것이며, 소년의 이 외침이 마드리드의 어원이 됐다고 한다.
이 문장은, 마드리드를 방문해 본 이들이라면 매우 친숙할 것이다. 관광객들이 가장 모이는 솔 광장에도 엘 오소 이 엘 마드로뇨(El Oso y El Madrono)라 불리는 딸기나무와 곰 동상이 도시의 상징처럼 세워져 있으며, 관광지가 아니더라도 택시, 심지어 보도블록 맨홀 뚜껑에도 이 딸기나무와 곰이 새겨져 있다. 실제로 딸기나무와 곰은 마드리드시의 문장이기도 하다.
곰이 자리를 옮긴 것 정도로 너무 민감한 게 아니냐 싶겠지만, 역사를 알면 그렇지 않다. 마드리드시가 이 문장을 쓴 건 공식적으로 1222년, 한국으로 치면 고려 시대부터다. 처음 문장이 만들어진 후 지금까지 아홉 차례 개편되었으며, 현행 마드리드시의 문장은 1982년에 새로이 제작된 것이다. 그런데 800년 가까이 되는 시간 동안 문장 속의 곰은 딸기나무 기준으로 늘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좌우가 바꾼 건 단순히 디자인적인 변화가 아니라 마드리드의 정체성을 뒤흔들었다고 여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들에게 디자인적으로 예쁜 건 둘째 문제였던 듯하다. 실제로 유럽인들은 그 작은 엠블럼에도 향토색과 의미를 가득 불어넣고 고수하려 한다. 마드리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보기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내놓은 새 엠블럼은 자신들을 향한 기만인 것이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팬들은 엠블럼 문제로 촉발된 클럽과의 갈등에 대해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 클럽이 팬들의 의사를 묻고 함께 고민하는 절차 없이 엠블럼을 비롯한 너무 많은 변화, 이를테면 새 홈구장에 ‘완다’라는 중국 기업의 네이밍 스폰서가 붙은 것과 같은 일이 분노하고 있다. 다시 엠블럼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클럽이 많은 돈을 들여 더 세련된 엠블럼을 만들 수 있다손 치더라도, 팬들이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게 현지의 팬심이다.
이 때문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팬들은 온·오프라인 할 것 없이 새 엠블럼 반대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세계적 청원 사이트인 change.org를 통해 전 세계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팬들에게 자신들과 뜻을 함께하자는 메시지를 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몇몇 강성 팬들은 훈련 구장으로 쳐들어가 선수들이 트레이닝하는 동안 새 엠블럼 반대 내용을 담은 걸개를 내걸었다. 또, 킥오프 후 12분 동안 관중석을 비워놓는 퍼포먼스를 펼쳐 현지 언론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12분은 열성적 팬을 뜻하는 ‘12번째 선수’에서 따온 것이며, 이 자리를 비워둠으로써 “팬들을 존중하라”라는 메시지를 던지려고 한 것이다. 스티커 부착은 사실 애교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하지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팬들의 아우성을 듣는 척을 하지 않는다.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 과거 팀의 정신적 지주 구실을 한 가비 등은 팬들을 존중해야 하며 그들의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그때뿐이었다.
엠블럼 제작자인 브루노 셀레스는 논란이 커지자 해명을 하긴 했는데, 핵심 내용은 “조그마한 변화가 있을 때 반대의 목소리가 나오는 건 늘 있는 일”이었다. 지금은 시끄럽더라도 이내 잠잠해질 거라는 얘기다. 그런 고자세를 완다 메트로폴리타노에서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완다 메트로폴리타노 외부에도 딸기나무와 곰 동상이 서 있다. 하지만 곰은 새 엠블럼에 맞춰 나무 왼쪽에 서 있다. 마드리드를 돌아다니면서 이와 관련한 동상과 문양을 수없이 봤지만, 나무 왼쪽에 선 곰을 그곳에서 처음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