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요 바예카노 팬들의 분노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는 레알 마드리드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라는 거인들이 존재한다. 수년 전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가장 높은 무대라 할 수 있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자웅을 겨루었으며, 심지어 레알 마드리드는 대회 최다 챔피언 획득이라는 대기록을 보유하며 유럽 최고의 명문 클럽으로 공인받고 있다.
당연히 마드리드를 찾는 축구팬들은 대부분 곧장 이 두 팀 탐방에 나선다. 이중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앞에는 해외에서 몰려든 축구팬들, 특히 중국인들로 구성된 단체 관광객이 버스 수 대를 끌고 다니며 레알 마드리드 안방 구석구석 다닌다. 덕분에 이 두 팀의 경기장은 매치 데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늘 붐빈다.
그런데 라요 바예카노라는 클럽도 있다. 노동자 계층 현지 팬들을 대변하는 팀이라 국제적으로 그리 유명하진 않다. 그 라요 바예카노의 안방 캄포 데 바예카스를 찾았다. 클럽의 규모가 크지 않은 데다 시설도 낙후된 운동장이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완다 메트로폴리타노, 그리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옛 구장인 비센테 칼데론에 비한다면, 아니 비교하는 게 쑥스러울 정도로 남루하고 초라하다. 그래도 단순히 관광 명소가 아니라 현지에 가야만 찾을 수 있는 스토리를 위해 떠난 여행인 만큼, 앞서 소개한 마드리드 거인들의 안방보다 이 캄포 데 바예카스를 먼저 찾고 싶었다.
마드리드 지하철 1호선 포르타스고 역에 자리한 캄포 데 바예카스의 주변 분위기는 썩 좋지 못했다. 경기장 외관 시멘트 벽에는 원어로든 한글이든 차마 전할 수 없는 욕설이 상당히 많이 적혀 있다. 방문했을 당시에는 시즌 내내 부진을 면치 못하며 강등권으로 추락했었으니 그런가 싶었다.
하지만 스페인 내에서 ‘가난해도 자랑스럽다’라는 모토로 스페인 내에서 유명한 라요 바예카노 서포터스의 성향을 고려하면 단순히 성적이 나지 않아서 이처럼 화를 내는 게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사실 강등과 승격을 경험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그들은 늘 그렇게 위험한 위치에서 시즌을 치러왔다. 이런 어려움, 그들 스스로 모를 리 없다는 얘기다.
이들의 성향과 추구하는 정신은 영국 출신 축구 전문 기자 로비 던이 쓴 ‘워킹 클래스 히어로스: 마드리드의 잊힌 팀, 라요 바예카노 이야기(Working Class Heroes: The Story of Rayo Vallecano, Madrid’s Forgetten Team)’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라요 바예카노 팬들은 애당초 클럽이 가난하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팀을 응원한다. 대신 성적보다는 ‘물러섬 없이 용감하며, 품격 있는 경기’를 보다 요구한다. 또한 ‘안티 파시스트’라는 정치적 성향을 가진 노동자 그룹이라 클럽이 이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은 2017년 겨울 이적 시장에서 라요 바예카노가 야심 차게 영입한 우크라이나 국가대표 공격수 로만 조줄야를 내쫓아내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국가대표로도 30경기 이상 뛴 조줄야는 전력이 약한 라요 바예카노로서는 누리꾼 표현을 빌자면 시쳇말로 검증된 ‘꿀 영입’이었다. 그런데도 팬들이 조줄야를 쫓아낸 이유는 바로 우크라이나 네오 나치 단체에 동조한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단 운영이 조금이라도 정의에 벗어나면 곧장 행동으로 옮기는 팬들로 유명한 팀이 바로 라예 바예카노다.
캄포 데 바예카스를 찾았을 당시 팬들이 클럽을 향해 분노를 품고 있음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정확히는 라울 마르틴 프레사 라요 바예카노 회장을 향한 증오가 가득하다. 팀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매우 크다.
막상 현장에 가보니 경기장 주변 관리부터 안 됐다. 경기장 주변은 욕설로 가득한 낙서가 가득했고, 매표소 등 주변 시설은 녹이 슬고 무척 지저분했다. 아무리 건물이 낡았다고 해도 그 안에서 최대한 깔끔하게 시설을 정비하고 팬들을 맞이하는 게 팬들을 위한 예의지만 캄포 데 바예카스에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경기장 문제는 말이 무척 많았다고 한다. 보수 공사를 명목으로 팬들에게 이렇다 할 통보 없이 폐쇄되는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건설 자재가 스타디움 주변에 어지럽게 널려 있어 공사판 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한 어린아이가 이곳에서 크게 다칠 뻔한 일도 일어났다. 현지 팬들 사이에서는 예고된 인재였다고 분노하며 시위를 벌였다.
<아스> 등 스페인 언론에 따르면 팬들은 안전에 심각한 결함을 드러내기 시작한 캄포 데 바예카스에 대해 우려를 드러냈으며, 구단이 새 구장 건립에 관한 방안을 마련하길 원했다. 실제로 10년 전부터 이런 이야기가 현지 커뮤니티에 오갔다고 한다. 하지만 2011년부터 클럽의 살림을 책임진 프레사 회장은 이런저런 이유로 구장 건립이 당장은 어렵다고 회피했다. 프레사 회장이 한창 시위가 뜨거웠던 2018년 10월 <마르카>와 가진 인터뷰는 실로 가관이다.
프레사 회장은 기자로부터 “2년 동안 이 경기장을 올 때마다 장내에 비둘기 배변과 흙더미가 널려 있더라”라는, 실로 굴욕적인 질문을 받아야 했다. 새 구장은 고사하고 청소라도 잘하고 있냐는 비아냥을 면전에서 받은 것이다. 프레사 회장은 “청소한다. 그물 등을 이용해 비둘기를 내쫓지 않을 것이며, 매가 자연적으로 퇴치해줄 것”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이 모든 험담이 반대파들의 모함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팬들은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캄포 데 바예카스 주변을 걸으며 프레사 회장이 정말 귀를 닫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욕설이 가득한 낙서와 노골적인 반골 기질을 담은 스티커가 경기장 외벽 곳곳에 가득했지만, 이건 문제 될 게 아니다. 도리어 라요 바예카노 팬들의 낙서는 낡고 지저분한 캄포 데 바예카스와 그 주변을 그나마 볼거리 있는 곳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다.
프레사 회장을 비롯한 구단 측이 정말로 경기장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건 따로 있다. 스타디움 처마를 지붕 삼아 누워서 자는 홈리스였다. 유럽에서 부랑자들을 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긴 하다. 역 주변에 이런 사람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유럽을 비롯해 전 세계 축구장을 다니면서 스타디움에 홈리스가 눌러사는 건 난생처음 봤다. 앞으로도 아마 보지 못할 듯하다. 심지어 홈리스가 자리를 깔고 앉은 위치는 구단 사무실에서 걸어서 10m도 안 되는 곳이었다.
이쯤이면 구단을 거의 방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데도 무슨 자신감인지, 한때 미국에 라요 오클라호마 시티라는 위성 클럽도 만들어 팬들을 더욱 열불 나게 했다. 성적 여부를 떠나 기본부터 다시 해야 할 라요 바예카노라 할 수 있다.
라요 바예카노 팬들은 지금 화병이 날 지경이다. 숙소로 돌아와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통해 현지 팬들이 래커로 거칠게 써 내려간 글귀를 해석해보았다. 그중 한 글귀를 소개한다. 이름 모를 이 팬은 외벽에 “Vayanse al carajo! Yankees de merida”라는 욕설을 남기기도 했다. 우리말로 최대한 순화해도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욕설과 미국으로 가라는 얘기 정도라고 설명하겠다. 팬들은 이처럼 클럽 운영을 엉망으로 한 프레사 회장에 대해 진절머리를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