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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Oct 07. 2021

삼등석 마드리드 더비 vs
일등석 일반 경기

스페인 라 리가 기행문

마드리드 푸에르타 델 솔 광장, 처음 방문했을 땐 이런 곳을 가지 못했었다. @풋볼 보헤미안

서두부터 삼천포로 빠지는 듯하지만, 세비야에서 마드리드로 향하는 과정은 유럽 축구 유랑 여정을 통틀어 가장 쾌적했던 것 같다. 시원스레 내달리는 스페인 고속철도 렌페를 스페인의 따스한 풍경을 눈으로 담으며 즐거워했고, 무진장 딱딱했던 저가 장거리 버스 시트가 아닌 편안한 좌석에 소소한 행복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른 곳도 아닌 마드리드를 방문하는 것도 마음을 들뜨게 하는 이유기도 했다. 


사실 마드리드를 방문한 건 처음이 아니다. 2013년 1월 레알 마드리드의 안방이자 전 세계 축구팬들의 성지로 불리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1라운드 레알 마드리드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맞대결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취재차 방문했던 마드리드에 당시 머물렀던 기간은 1박 3일, 마드리드의 정취를 느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언제고 다시 찾아 그때의 한을 풀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다짐이 현실이 된 것이었기에 정말 즐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시 돌이켜보면 결국 축구만 보다 끝난 것 같다. 이놈의 직업병이라고 속으로 가슴치고 있지만, 겉으로는 그럴 만했다고 외치고 싶다. 앞에서 언급한 레알 마드리드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라이벌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마드리드 광역권까지 합하면 라요 바예카노·헤타페 등 굴지의 라 리가 클럽들이 이곳에 가득 모여 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방문했을 당시 라 리가 경기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심지어 라 리가를 대표하는 빅 매치인 마드리드 더비가 완다 메트로폴리타노에서 예정되어 있었다. 전 유럽이 지켜보는 경기라 과연 티켓이 있을까 싶은 걱정도 들었지만, 정말이지 꼭 보고 싶었다. 비록 예매는 하지 못했지만, 리스본에서 포르투갈 최고의 라이벌전 벤피카와 스포르팅 CP의 리스본 더비를 현장 티켓 구매에 성공한 바 있어선지 이곳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격전지 완다 메트로폴리타노로 향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안방 완다 메트로폴리타노 @풋볼 보헤미안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옛 홈구장 비센테 칼데론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이 완다 메트로폴리타노는 처음이었다. 아직 인근 지역 인프라를 완벽하게 구축되지 않았기에 주변의 온통 공사판이었던 터라 좀 어수선했지만, 경기장만큼은 대단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뺨치는 거대한 외관 규모에 감탄했다. 곧장 티켓 오피스로 향했다. 마드리드 더비이니 티켓이 없을 수 있고, 있어도 비쌀 것이라고 나름대로 각오하고 창구에 갔다. 그랬더니 세상에, 티켓이 있다. 그런데 거기서 다시 고민에 빠졌다.     


완다 메트로폴리타노 관중석 가장 꼭대기 부근, 그러니까 관전의 관점에서는 TV가 훨씬 나을 법한 자리였다. 그 좌석에 매겨진 가격은 무려 130유로(약 16만 원), 매일 좁디좁은 호스텔 침대에 몸을 꾸깃꾸깃 누여 잠자리에 들고 언감생심 현지 유명 맛집 탐방은 사치라 여긴 거지 축구 유랑객에게는 너무 큰돈이었다. 게다가 앞으로 거쳐야 할 여정이 여전히 아득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마드리드 더비 보고 3일 정도 굶기 아니면 포기하고 다른 일정을 모색하기를 놓고 고민에 빠진 것이다.     


그 와중에 마드리드 인근에 다른 경기가 있을까 검색도 했다. 그랬더니, 있다. 마드리드 광역 철도를 타면 시내에서 30분 거리에 위치한 에스타디오 알폰소 페레스에서 헤타페와 셀타의 맞대결이 예정되어 있었다. 대안이 있어 다행이긴 한데, 하필 포기해야 할 경기가 마드리드 더비라니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티켓 오피스 리셉션 한구석에서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고심 끝에 마드리드 더비를 포기했다. 카림 벤제마·루카 모드리치·세르히오 라모스 같은 대스타의 얼굴이 스치니 그냥 사흘 굶을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결국 놓아줬다. 그리고 달려간 헤타페의 안방 에스타디오 알폰소 페레스, 지금 와서 다시 돌이켜보면 그 선택은 옳았다. 아니, 쓸데없이 고민하며 보낸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헤타페 vs 셀타 입장 티켓, 50유로! @풋볼 보헤미안

헤타페의 한적한 주택가 한복판에 자리한 에스타디오 콜리세움 알폰소 페레스의 외관은 여러모로 완다 메트로폴리타노 그리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와는 달랐다. 현지인보다 외지인들이 더 많은 완다 메트로폴리타노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와 달리, 이곳은 정말 로컬 축구팬들이 가득했다. 삼삼오오 가족들의 손을 잡고 경기장으로 향하는 현지 팬들을 보면서 진정 ‘레알’ 라 리가의 재미와 정취를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켓값은 50유로(약 6만 8,000원), 심지어 선수단 벤치 뒤에서 경기를 즐길 수 있는 일등석 자리였다. 유레카를 외치며 티켓 오피스에서 결제했다. 난데없이 웬 동양인 이방인이 여기에 왔느냐는 시선이 뒤통수에 꽂혔지만, 상관없었다. 어찌 됐든 세계 최고 리그 중 하나인 라 리가의 경기를 선수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에서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경기장 내 흡연이 가능하고 사람들이 내뱉는 해바라기 씨 껍질을 보면서 아 역시 스페인 축구장 풍경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헤타페 경기장의 분위기는 흔히 생각하는 스페인 축구 경기장 이미지와는 달랐다. 열정적인 팬들이 광적인 열기를 뿜어대며, 흥분의 임계점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걸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돈 있고 나이 지긋하신 팬들이 주로 자리한 일단 일등석이었다는 걸 고려해야겠으나,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서포터스석을 바라봐도 광적 혹은 폭력적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의 선창에 눈썹 희끗희끗한 노인 팬도, 어린아이 팬도, 뜨거운 가슴을 가진 젊은 팬도 합창하는 모습이 꽤 장관이었다   

일등석 좌석의 환상적인 시야, 선수들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풋볼 보헤미안

일등석 한복판에 앉아 있으니, 옆 좌석의 현지 어르신 팬이 팬샵에서 샀을 법한 구단 매거진 책자를 전달하며 일본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당시 헤타페에는 일본 국가대표 미드필더 시바사키 가쿠가 뛰고 있었다. 시바사키를 응원하지 않는 이상 외지인, 그것도 아시아 축구팬이 이곳에 올 리 없다는 현지 팬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한국이라고 했더니 더 놀란다. 도대체 왜라는 눈길을 주는 그의 표정을 보며 뭐라 답해야 할지 그냥 웃고 말았다. “저, 축덕이에요”라고 말하고 싶진 않았다.  


이아고 아스파스·하이메 마타 등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잘 알지 못하는 선수들이 피치를 누비긴 했으나 스페인 특유의 오밀조밀한 빌드업을 통한 공격 축구의 공방은 손에 땀을 쥘 만큼 흥미로웠다. 지붕 근처의 관중석에서 바라봤다면 선수들이 콩만하게 보였을 완다 메트로폴리타노와 달리 에스타디오 콜리세움 알폰소 페레스의 관전 여건은 경기를 더욱 박진감 넘치게 느끼게끔 했다. 홈팀 헤타페의 승리, 일요일 오전에 벌어졌던 이 경기를 즐겁게 지켜본 헤타페 팬들은 남은 주말의 여유를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다는 표정으로 귀가했다.     


유럽을 찾는 축구팬들에게 스페인 라 리가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와 더불어 꼭 한 번 현장에서 지켜보고 싶은 무대로 꼽힌다. 그렇지만 레알 마드리드·바르셀로나·아틀레티코 마드리드처럼 글로벌 스타들이 가득한 매머드 클럽의 경기에만 관심이 몰리는 게 현실이다. 물론 그들의 세계 최정상급 경기력과 환상적인 홈구장 분위기를 즐기는 것도 훌륭한 생각이다. 하지만 진짜 스페인 축구를 느낀다면 조금 눈높이를 낮춰 다른 팀들의 경기를 지켜보는 걸 추천한다. 생생한 현지 느낌, 진짜 스페인 축구가 주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헤타페의 홈 에스타디오 콜리세움 알폰소 페레스 @풋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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