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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Oct 04. 2021

역작을 남긴 세비야의 축덕 예술가

산티아고 델 캄포의 모자이크

네르비온 플라사 쇼핑몰에서 바라본 에스타디오 라몬 산체스 피스후안 @풋볼 보헤미안

축구 경기장이 만남의 장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참 많다. 아픈 얘기지만, 지금껏 겪어온 한국 내 축구 경기장이 그렇지 못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일부 축구팬들이 모이거나, 경기장을 쓸 용무가 있는 이들이 아니면 매치 데이가 아닌 평시에 스타디움 인근에 많이 모이는 경우를 그리 많이 보진 못했기 때문이다. 


축구 경기장이 만남의 장소가 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축구를 가까이할 것이며, 사람이 모이면 모일수록 지역 여론이 형성되는 장 구실을 한다. 그리 되면 축구 경기장은 그때부터는 단순히 운동 경기가 벌어지는 곳이 아니게 된다. 더 큰 의미를 지니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에스타디오 라몬 산체스 피스후안이 바로 그러한 곳이 아닐까 싶다. 스페인에서 소문난 팬덤을 가진 세비야 FC의 안방이기에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지만, 평시에도 이 경기장은 세비야 시민들이 약속과 만남의 장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경기장 서쪽 통로와 연결되어 있는 대형 쇼핑몰 네르비온 플라사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오가기도 하지만, 그 쇼핑몰을 떠나서도 사람들이 미팅 포인트로 삼을 만한 멋진 상징물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라 리가 세비야의 경기를 소개할 때 한 번쯤은 꼭 봤을 모자이크 작품일 것이다. 20세기 세비야를 대표하는 예술가인 산티아고 델 캄포의 대표 작품인 1982 FIFA 스페인 월드컵 기념 세라믹 모자이크다.      

세비야 FC를 넘어 세비야의 상징이 된 델 캄포의 세라믹 모자이크 벽화 @풋볼 보헤미안


이 작품은 480 제곱미터, 얼추 자그마한 농구장만한 크기를 가지고 있다. 스페인 특유의 밝고 힘찬 컬러가 촘촘히 모자이크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미술에 문외한인 풋볼 보헤미안도 절로 감탄이 나왔다. 자세히 살펴보았다. 멀리서는 그저 단순히 예쁘다고 느꼈던 작품에는 축구적인 의미를 가득 담겨 있다. 최상단에는 경기장명이 멋진 폰트로 새겨져 있으며, 정중앙에는 거대한 세비야의 엠블럼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좌우에는 1982년을 기준으로 그간 세비야와 친선 경기 등 여러 경로를 통해 교류를 가졌던 세계적 명문 클럽들의 페넌트가 가득하다. 총 40개 클럽의 페넌트가 형상화되어 있는데 이 벽화에 새겨진 클럽은 다음과 같다.     

정중앙에 자리한 세비야 FC 엠블럼 좌우에는 이처럼 다른 클럽들의 페넌트가 새겨져 있다. @풋볼 보헤미안

스페인 :알메리아·아레나스·아슬레틱 빌바오·아틀레티코 마드리드·바르셀로나·레알 베티스·카디스·셀타 비고·코르도바·코리아·에스파뇰·그라나다·레알 하엔·라스 팔마스·레알 마드리드·말라가·레알 오비에도·라싱 페롤·레알 라싱 클럽·레알 소시에다드·레크레아티보·사바델·스포르팅 히혼·레알 우니온·발렌시아·레알 사라고사

덴마크 : 아르후스 GF

벨기에 : 안더레흐트

잉글랜드 : 아스널

독일 : 바이에른 뮌헨

포르투갈 : 벤피카·스포르팅 CP

아르헨티나 : 보카 주니오스·인디펜디엔테·뉴웰스 올드 보이스·리버 플라테·산 로렌소

브라질 : 플루미넨세·산투스·바스쿠 다 가마

스코틀랜드 : 레인저스

크로아티아 : 하이두크 스플리트

헝가리 : 부다페스트 혼베드

이탈리아 : 유벤투스·라치오·AC 밀란

콜롬비아 : 미요나리오스

우루과이 : 페냐롤

오스트리아 : 라피드 빈

프랑스 : 스타드 랭스     

하단에 새겨진 기묘한 타이포그래피는 세비야 FC와 이 경기장의 역사를 뜻한다. @풋볼 보헤미안

주로 스페인 클럽들이 리스트를 가득 메우며, 해외 팀들은 저마다 그 나라에서는 최고의 역사를 가진 명문으로 통한다. 그리고 하단에는 역시 1982년 기준으로 여덟 가지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중요한 이벤트를 소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05 PSS 세비야가 처음으로 소유한 홈구장 프라도 데 산 세바스티안의 설립연도.

1908 P.de E. 세비야의 두 번째 홈이었던 플라사 데 에스파냐의 설립연도

1910 M 세비야의 세 번째 홈이었던 캄포 델 메르칸틸에서 경기를 치른 해.

1918 RV 세비야의 네 번째 홈 라 빅토리아에서 경기를 치른 해.

1923 SH 세비야 소속 첫 스페인 국가대표 선수 스펜세르와 에르미니오를 배출한 해.

1929 N 현재 연고지 세비야 네르비온 지구로 근거지를 옮긴 해

1958 RSP 클럽 역대 최고 회장으로 꼽히는 라몬 산체스 피스후안의 회장 취임식이 열린 해.

1982 M 1982 FIFA 스페인 월드컵 경기장으로 쓰인 해     


그러니까 세비야 FC와 에스타디오 라몬 산체스 피스후안의 역사를 모두 담고 있는 작품인 셈이다.      

엄청난 공력을 들여 만들었을, 그리고 지금은 세비야의 랜드 마크로 자리하게 된 이 모자이크는 20세기 세비야 최고의 예술가로 꼽히는 산티아고 델 캄포의 역작이다. 그야말로 델 캄포가 모태 세비야 FC 광팬이라는 ‘축덕력’을 예술혼으로 불태워 만든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2015년 작고한 델 캄포는 이 작품을 통해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단순히 1982 FIFA 스페인 월드컵을 기념하고, 그리고 자신의 ‘세비야 자부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여긴다면 이 작품을 완전히 이해한 게 아니다. 델 캄포는 이 작품의 진짜 메시지는 바로 세비야 엠블럼 좌우를 가득 메운 페넌트에 있다고 소개했다. 스페인 매체 <스포르트>에는 델 캄포가 생전에 남긴 멘트가 남아 있다. 구구절절한 해석보다는 작가 본인의 이야기를 전하는 게 옳겠다.      


이 작품을 통해 강조하고 싶은 건 경쟁이 아닙니다. 스포츠가 사람들에게 주는 우애, 다른 이들과 스포츠를 즐기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그리고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모두가 서로 존중하는 스포츠이길 원합니다.    

그 상생을 상징하는 게 바로 페넌트입니다. 축구 클럽은 경기를 통해 처음 만났을 때 페넌트를 교환합니다. 이 페넌트는 ‘우리는 친구’라는 걸 뜻합니다. 상대는 나의 이야기를, 나는 상대의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페넌트를 소중히 여기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그 아이디어를 좋아했습니다. 

우리 팀이 상대를 이기는 걸 우선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반대로 신사답게 지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그래서 친구를 사귀고 상대를 기억하는 방법부터 익히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피치에서는 치열하게 승부해야겠지만, 상대팀도 우리와 같은 권리를 가진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그게 이 작품에 새겨진 페넌트에 담긴 상징입니다.   
작품을 만든 산티아고 델 캄포의 사인도 살펴볼 수 있다. @풋볼 보헤미안

페넌트 교환은 축구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퍼포먼스다. 한국의 관점에서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일반적인 프로 리그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기 힘들다. 자주 부딪치는 친숙한 동반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나기 힘든 해외 팀과 대결할 때, 특히 A매치의 경우에는 어김없이 볼 수 있다. 양 팀 주장이 주심의 중재 하에 선공을 먼저 정한 후 악수와 함께 페넌트를 주고받고 기념사진을 촬영한다.      


그간 취재 현장에서 숱하게 지켜봤던, 솔직히 별 감흥이 오지 않았던 이 모습을 델 캄포는 축구 경기에서 볼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풍경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의 의미 부여 덕에 페넌트 교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됐다. 축구 경기는 단순히 승부를 판가름해야 하는 험악한 대결이 아니다. 


똑같은 인원이 똑같은 시간 안에서 똑같이 땀을 흘려 선의의 경쟁을 펼쳐 영원한 우호를 다짐하는 장이다. 승리에 매몰되어 쉽게 잊는 페어플레이의 숭고한 의미를 델 캄포는 에스타디오 라몬 산체스 피스후안의 화려한 세라믹 모자이크를 통해 후세에 전하고자 했다. 잊고 있었던 가치를 그의 작품에서 새삼 느끼게 됐다.

“이 경기장 팬들은 스페인 대표팀을 위한 특별한 응원을 위해 12번째 선수로 지명됐습니다.” 델 캄포도 영락없는 스페인 팬이다. @풋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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