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풋볼 보헤미안 Oct 03. 2021

세 선수의 비극,
그들을 잊지 않는 세비야의 두 형제

푸에르타, 베루에소, 그리고 로케

하나 먹어보고 싶었던 세비야 더비 쿠키 @풋볼 보헤미안

리스본에서 밤 버스로 세비야로 향하면서 왠지 모를 낭만에 푹 빠졌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위대한 항해가 시작된 곳, 왠지 흥겹게 춤을 추어야 할 것 같은 플라멩코 리듬을 흥얼거리게 되는 곳, 향긋한 오렌지 나무들의 천국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라 그런지 제법 들떴다. 물론 이베리코 하몽의 고향이라는 맛의 도시라는 점도 매력 만점이다.


축구적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매력적인 도시는 스페인 라 리가에서 내로라하는 팬덤을 가진 두 클럽 세비야 FC와 레알 베티스를 가지고 있다. 어찌나 치열한지 그 유명한 엘 클라시코마저도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할 정도라고 한다. 상대 진영에 라이벌 팀 옷이나 색상을 입고 가면 안 된다는 이야기, 베니토 비야마린에서 라몬 산체스 피스후안까지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데 그 길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제법 긴장도 했다. 하여 두 팀의 라이벌 의식을 접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두 팀의 역사를 살피면,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힘든 관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비야는 여느 유럽 클럽처럼 이주한 영국인들의 손에 만들어진 중산층의 클럽이다. 반면 베티스는 현지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창단된 노동자의 팀이다. 한때 치열하다 못해 폭력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현지에서 직접 느끼는 실체는 또 다른 듯하다. 말처럼 위험하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고, 지역 사회에서 두 팀은 그저 세비야를 자랑스럽게 대표하는 클럽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또, 걸어가기에는 꽤 발품을 팔아야 할 정도로 두 팀의 스타디움 간 거리는 멀었다. 세비야 중심지에 위치한 세비야의 홈 라몬 산체스 피스후안과 남부에 자리한 레알 베티스의 안방 베니토 비야마린은 대중교통편으로 족히 한 시간은 걸리는 거리를 두고 있다. 


과거에는 말보다 주먹이 앞섰던 관계였을지 모르지만, 이젠 옛 얘기가 되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한 쿠키 가게에서는 두 팀의 엠블럼을 활용해 과자까지 손님에게 판매하고 있던 모습을 보며 더 그런 생각을 갖게 됐다. 그냥 지역 사회에 중요한 두 커뮤니티라는 느낌 이상은 받지 않았다.  그리고 이 두 팀은 공교롭게도 슬픈 사연을 가진 공통점을 공유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 흔적은 라몬 산체스 피스후안과 베니토 비야마린에 가면 확인할 수 있다.     

출중한 재능을 못 다 피운 비운의 선수 안토니오 푸에르타 @풋볼 보헤미안

세비야의 근거지 라몬 산체스 피스후안은 정말 아름다운 외관을 갖추고 있다. 1955년 문을 연 이 경기장의 외벽은 마치 파블로 피카소의 예술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런데 흥미진진하게 감상했던 그 외벽보다 더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안토니오 푸에르타의 그림이다.     


푸에르타는 촉망받는 레프트백이었으며, 유망주 시절 세르히오 라모스의 ‘절친’으로 너무나도 유명했던 선수다. 하지만 꽃을 피우지 못했다. 2007년 헤타페전을 치르던 중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했다. 당시 경기 영상을 직접 봤던 기억이 나기에 생생하다. 


푸에르타는 쓰러진 후 주변 사람들의 도움 덕에 겨우 의식을 찾아 라커룸으로 향했었다. 그 모습에 모두가 안도했으나, 다시 쓰러진 후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아내가 임신 중이었다는 건 이 비극을 더 슬프게 만들었다. 푸에르타의 죽음은 당시 전 세계 축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에도 수많은 축구인들이 떠난 그를 추모했다. 라모스가 푸에르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추모한 것은 대단히 유명한 일화다.      


세비야는 라몬 산체스 피스후안 외벽에다 푸에르타를 새겼다. 프로 데뷔 후 3년 만에 목숨을 잃어 더는 피치를 누비게 되지 못하게 된 푸에르타지만, 세비야가 배출한 수많은 스타들을 제치고 클럽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런데, 푸에르타와 같은 일화를 가진 세비야 선수가 또 있다는 걸 현지에서 알 수 있었다. 바로 1970년대 활약했던 왼쪽 미드필더 페드로 베루에소다.      

푸에르타와 같은 비극을 겪었던 1970년대 스타 페드로 베루에소 @풋볼 보헤미안

베루에소는 1973년 1월 7일 폰테 베드라를 원정 경기를 벌이던 중 쓰러졌다. 사인도 심장마비였으며, 심지어 아내가 임신 중이었던 것도 푸에르타와 판박이다. 그러나 등 번호 10번을 달고 뛴 당대 최고의 세비야 스타였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당대에는 푸에르타 사건보다 더 큰 충격을 줬을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 아픔이 34년 후 똑같이 되풀이됐으니 세비야가 받았을 황망함이 얼마나 컸을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 안타까운 사연 때문인지 몰라도, 세비야는 라몬 산체스 피스후안 외벽에 이 두 선수를 영원히 새겼다. 비록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어도 그들이 영원한 세비야의 선수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레알 베티스의 홈 베니토 비야마린에도 같은 존재가 있다. 촉망받던 센터백 미키 로케가 그 주인공이다. 푸에르타·베루에소처럼 경기 중에 사망한 건 아니었기에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이 사망 사건은 현지 레알 베티스 팬들을 비통함에 빠뜨렸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선수다 보니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로케는 본래 바르셀로나 출신이며, 라파 베니테스 감독의 눈에 들어 만 17세의 어린 나이에 2005년 리버풀에 입단했다. 하지만 거친 경쟁을 이기지 못하고 올드햄 애슬래틱·헤레스·카르타헤나 등 하부리그 클럽을 전전했던 선수였다. 레알 베티스와는 2009년에 인연을 맺었는데, 그마저도 처음에는 B팀에서 뛰어야 했으니 빛을 보지 못한 시기가 꽤 길었던 선수였었다.     


힘든 시기를 겪던 로케가 빛을 본 건 2010-2011시즌이었다. 그해 레알 베티스의 1군 선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위 유럽 빅 리그에서 경기 출전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으니 로케가 맛봤을 감격은 무척이나 컸을 것이다. 그런데 그 행복이 오래가지 않았다. 한 시즌도 가기 전 로케는 청천벽력 같은 일을 겪었다. 등을 다쳐 정밀 검진을 받던 중 골반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로케는 더는 선수 생활을 할 수 없었고, 끝내 그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실로 비운의 선수였다.      

하늘로 떠난 후 베니토 비야마린에 새겨진 미키 로케 @풋볼 보헤미안

레알 베티스는 겨우 꽃망울을 터뜨렸던 로케를 살리기 위해 정말 노력했다. 사족이지만, 스페인에서는 골반암은 의료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겨우 프로 1군이 된 로케의 수중에는 큰돈이 없었고, 이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클럽과 팬들이 직접 나서 자선 사업을 벌이며 로케를 구하려 했다.     


십시일반으로 모인 치료비를 통해 로케는 무사히 수술까지 마칠 수 있었다. 비록 선수로는 뛰지 못하더라도, 한 인간으로서 여생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모두가 안도했다. 하지만 신은 너무도 가혹했다. 로케는 수술을 받은 지 1년 만에 암이 재발해 끝내 목숨을 잃었다.      


로케의 죽음 이후 많은 스페인 축구인들이 추모했다고 알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인물은 유로 2012에서 정상을 차지한 스페인의 우승 세리머니에 함께 한 골키퍼 페페 레이나다. 당시 스페인의 백업 골키퍼였던 레이나는 당시 로케의 레알 베티스 유니폼을 입고 우승 뒤풀이를 즐겼다. 같은 바르셀로나 출신에, 함께 리버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비운의 유망주 로케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인간의 기억은 야속하고 나약하다. 시간이 흐르면 아무리 슬픈 죽음도 잊히는 법이다. 로케는 그 이후 언급되지 않고 많은 이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나름 스타였던 푸에르타나 다니 하르케의 죽음은 종종 거론되기도 하지만, 로케의 죽음은 쓸쓸하게도 언급되는 경우는 별로 없는 듯하다.     


하지만 베티스는 잊지 않고 있다. 베니토 비야마린 관중석에 로케의 현역 시절 모습을 거대하게 새겼다. 라몬 산체스 피스후안 외벽에 푸에르타를 그려 영원히 기억하려는 세비야처럼, 베티스 역시 로케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경기장에 표현했다. 베니토 비야마린 관중석에 새겨진 로케의 그림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커리어 내내 시련만 맛봤던 로케가 죽은 이후에야 모두가 기억하는 베티스의 별이 될 수 있었던 건 비극적인 일이었다.

레알 베티스 엠블럼 @풋볼 보헤미안


이전 05화 문맹의 무서움, 어느 포르투갈 전설의 비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