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수 원서(Won Seo)를 아시나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친숙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이렇게 반갑다는 걸 깨달았다. 벤피카 뮤지엄에서 겪은 경험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포르투갈 최고 축구 명문 벤피카의 붉은 유니폼을 입었던 어느 한국 선수의 이야기가 흔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혹 벤피카에 몸담았던 ‘원서(Won Seo)’라는 한국 선수를 아는가? 벤피카 출신 한국 국가대표 원서에 관련한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으려면 ‘붉은 독수리 군단’ 벤피카의 홈 이스타지우 다 루즈를 방문해야 한다.
본래 이곳을 찾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벤피카는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흥미로운 이슈로 가득 찬 클럽이다. 경기장 정문 앞을 지키고 있는 에우제비우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두 차례의 유러피언 컵을 연거푸 안기며 벤피카를 1960년대 초반의 절대 강자로 올려놓은 헝가리 출신 명장 벨라 구트만에 대한 이야기도 살필 수 있다.
사족이지만, 구트만 감독은 연봉 문제로 벤피카와 결별하면서 “향후 100년간 유럽 대회에서 우승 못 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저주를 남긴 이로 유명하다. 참고로 이 저주,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런가 하면 경기 중 비극적이게도 심장 마비로 목숨을 잃어 전 세계 축구 팬들을 안타깝게 했던 헝가리 출신 공격수 미클로스 페헤르의 동상을 접했을 때는 왠지 모를 먹먹한 심경이 들기도 했다.
친절한 벤피카 관계자들의 설명도 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벤피카의 스타디움 투어는 리스본을 찾는 축구 팬들에게는 꼭 추천한다. 보통 스타디움 투어는 구단 관계자의 인솔에 따라 여러 명이 쫓아다니는 형태로 진행되지만, 벤피카는 그렇지 않다. 구역별로 번호와 안내문을 남겨 놓았으며, QR코드를 활용해 팬들이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즐길 수 있게끔 했다. 그리고 포인트마다 구단 관계자를 배치해 구역을 관리함과 동시에 방문객들의 말벗으로 활동하게끔 조치했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만 다니면 되는 타 팀의 투어와 달리, 벤피카의 스타디움 투어는 이런 구조 때문에 첫인상이 다소 불친절하다고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환경을 잘 이용하면 도리어 벤피카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축구 이야기를 현지인들과 기탄없이 나눌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쪽이 좀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벤피카 클럽 하우스 소개를 맡은 한 큐레이터와 20분 동안 나눈 얘기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총 아홉 면의 운동장으로 이뤄진 최고의 시설을 가진 벤피카 클럽 하우스를 자세하게 소개한 이 남성은 곧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었다. 해서 한국이라는 답했더니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손흥민은 정말 잘하는 선수라 꼭 데려오고 싶은데, 비싸서 힘들 것 같다”는 그의 넉살에 함께 웃었다. 그리고 벤피카의 라이벌 클럽 스포르팅 CP의 레전드이자 사령탑 출신인 파울루 벤투 감독이 지금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맡고 있다고 하자, 그는 “정말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그런데 왜 조르제 제수스가 아니고 벤투냐”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되물었다.
그 큐레이터는 “벤투 감독은 고집도 세고 전술적으로 다소 경직된 스타일이라 경기가 재미없다”라며 공격적인 축구로 승부를 거는 제수스 감독이 훨씬 낫다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제수스 감독은 2009년부터 6년간 벤피카를 이끌며 열 개의 트로피를 안긴 벤피카를 대표하는 명장 중 하나다. 반면 벤투 감독은 벤피카의 라이벌 스포르팅 CP의 레전드다. 그러니까 남의 나라 대표팀 감독을 두고 ‘리스본 라이벌 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그의 반응에 정말 웃었던 기억이 난다.
라커룸은 당연하고 심지어 ‘마스코트’인 독수리의 사육 공간까지 공개할 정도로 ‘다 보여준’ 벤피카 탐험의 마지막은 전 세계를 아울러 벤피카 소속 국가대표를 소개하는 섹션이었다. 클럽 뮤지업에 소속 선수의 국가대표팀 발탁을 기념하는 공간을 마련하는 건 일반적이라 그리 놀랄 게 없는데, 벤피카만큼은 그렇지 않다.
대륙별로 구분해 나라별로 국가대표가 된 선수들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아시아 섹션에는 단 세 선수가 자리하고 있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 체제의 한국을 상대로 골을 넣어 중국에 승리를 안겨 한국 팬들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위다바오를 비롯한 중국 선수 2명이 이름을 올리고 있었고, 그 옆에 앞서 소개한 한국 국가대표 ‘원서’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순간 머릿속의 모든 지식과 기억을 다 떠올려봤으나 도저히 누군지 몰랐다.
결국 참다못해 박물관 큐레이터에게 “한국에서 왔는데 저 원서라는 선수가 누구냐”라는 질문을 던져야 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그 큐레이터는 왠지 ‘한국에서 왔다면서 왜 모르냐’라는 눈빛을 던지며 전산화된 데이터베이스를 보여주었다. 그 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된 사진을 보고서야 그 주인공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서정원 현 청두 룽청 감독이었다. 그제야 실마리가 풀리는 듯했다. 잊고 있었던 서 감독과 벤피카의 인연이 그제야 떠올랐다.
사실 서 감독의 공식 프로필에는 벤피카의 흔적은 볼 수 없다. 서 감독의 공식 소속 경력은 안양 LG→ 상무→ 스트라스부르→ 수원 삼성→ 리트→ 잘츠부르크 순이다. 그런데 왜 벤피카는 서 감독을 자신들의 선수였다고 표기했을까? 여기엔 사연이 있다.
사실 서 감독은 벤피카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고 정식으로 사인까지 했었다. 1998 FIFA 프랑스 월드컵 지역 예선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97년의 일이다. 지금이야 벤피카와 같은 명문 클럽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으면 대대적으로 축하해주는 분위기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대표팀의 부름을 마다하면서까지 꿈이었던 유럽 진출을 성공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는데, 이게 괘씸죄로 이어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선수의 해외 이적이 성사되려면 협회 간 국제이적동의서(ITC)가 오가야 한다. 당시 서 감독이 벤피카 이적을 매듭지으려면 대한축구협회(KFA)에서 발급한 ITC가 포르투갈축구협회(FPF)로 송부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 서류가 FIFA와 포르투갈축구협회의 승인을 얻어야만 이적이 최종 결정된다. 그러나 프랑스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핵심 선수를 잃을 수 없다고 생각한 당시 협회가 발급을 거부해버렸다. 실력으로 이뤄놓은 벤피카 이적은 그렇게 허망하게 없던 일이 됐다. 아마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축구계가 발칵 뒤집어졌을 것이다.
어쨌든 벤피카는 서 감독을 왜 정식 일원으로서 인정하고 있는 것일까? ‘원서’ 논란 때문에 옥신각신했던 큐레이터에게 서 감독의 정식 프로필에는 벤피카가 빠져 있는데도 이 팀에서 선수로 기록하는 이유를 물었으나 정확한 답을 듣지 못했다. 20년이 넘은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기에는 그 큐레이터의 나이가 다소 어렸기 때문일 것이다.
추후 사정을 조사해보니 벤피카가 서 감독을 자신들의 선수로 인정하고 있는 이유는, 어찌 됐든 벤피카의 유니폼을 입고 공식전을 뛰었기 때문이다. 서 감독의 정보가 담긴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1997-1998시즌을 앞두고 벤피카의 프리시즌 캠프에 합류해 네 경기를 뛰어 네덜란드 클럽 덴 보쉬전에서 한 골을 넣었다. 비록 ITC가 발급되지 못해 공식전을 뛰지 못했어도, 어쨌든 정식 계약 절차를 밟고 경기까지 뛴 선수인 만큼 과거 자신들의 선수였다고 보는 것이다.
포르투갈과 벤피카의 영웅인 에우제비우는 생전에 한국 축구계 관련 인사와 만날 때 종종 서 감독의 안부를 물어볼 정도로 각별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는데, 바로 이 인연 때문으로 보인다. 정말 스치듯 했던 인연이지만, 벤피카는 서 감독을 잊지 않고 있다. 벤피카를 혹 방문할 팬들은 이 공간을 반드시 들러 그들의 ‘의리’를 한번 느껴보자.
이스타지우 다 루즈를 떠나면서 만약 벤피카가 기억하는 ‘원서’가 포르투갈에서 펄펄 날았다면 그의 축구 인생은, 나아가 한국 축구는 어떻게 변했을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서 감독은 이적 실패 후 귀국길에 올라 1997시즌 K리그를 모두 마친 후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 클럽 RC 스트라스부르 입단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젊은 서정원은 주변 여건에 굴하지 않고 끝내 자신의 꿈인 유럽 진출을 이루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