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F 오스 벨레넨세스 레전드 페페 이야기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종종 즐거운 순간이 주어진다. 예정보다 일정을 빨리 마쳤을 때다. 반드시 눈에 담아야 할 것들을 살피고 주어진 자유 시간은 꿀맛이다. 본래 찾아갈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곳까지 탐험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리스본을 떠나기 전 주어진 반나절의 여유가 그랬다. 벤피카와 리스본 더비를 잔뜩 즐기겠다는 일념 하나만 있었던 터라, 현지의 대표적 관광지인 벨렝 지구를 떠나는 날까지 눈곱만치도 생각하지 않았다. 호스텔에서 한 여성 한국인 여행자가 호스트와 대화를 나누는 걸 곁에서 엿들으면서 벨렝 지구가 좋다는 얘기를 들은 게 계기였다.
막상 가본 벨렝, 전형적인 포르투갈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은 곳이라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대서양으로 흐르는 타구스 강변에 눈부시게 햇빛이 깔리는 그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벨렝탑, 대항해시대 발견기념비 등 포르투갈의 랜드마크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그 모습은 포르투갈을 찾는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축구의 흔적을 살폈다니. 이놈의 '축덕', 한숨이 절로 나오는 직업병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벨렝 주변에서 포르투갈 프리메이라 리가 클럽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으니, 그 주인공이 바로 CF 오스 벨레넨세스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벨렝 지구를 연고로 하며, 그들의 홈구장 이스타지우 두 헤스텔루가 벨렝탑 지척에 있어 한걸음에 찾아갔다.
이 클럽은 줄여서 벨레네센스라 불린다. 1919년에 창단한 이 팀은 다른 포르투갈 클럽이 그러하듯 축구를 주력으로 하는 종합 스포츠클럽이다. 그들의 홈구장 이스타지우 두 헤스텔루는 최대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이다. 다소 낡은 스타디움이지만, 주변 경치 덕에 멋들어져 보인다. 스탠드가 3면으로 이뤄져 있는데, 관중석이 없는 한쪽 면에는 아름드리 타구스 강이 흐르고 있다. 매치 데이에는 뜨거운 열기를 자아내는 경기 모습과 함께 진정 ‘그림’이 펼쳐지겠다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이 이스타디우 두 헤스텔루에는 어느 ‘레전드’의 슬픈 이야기가 후세에 전해지고 있었다. 현지에 가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라 흥미로웠고, 그 인물의 마지막이 너무도 비극적이라 안타까웠다. 그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스타지우 두 헤스텔루 정문 앞에 자리한 석조 조각상에 새겨진 페페다. 본명은 조세 마누엘 소아레스. 페페는 포르투갈 축구가 국제무대에 자랑스럽게 내세운 첫 번째 스타플레이어였다. 1920년대 중반에 축구계에 등장한 이후 5년 동안 포르투갈 최고의 선수로 주목받았다.
페페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우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벨렝 지역에서 야채상을 하며 겨우 생계를 이어가던 빈민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페페가 그 힘든 성장기를 견딜 수 있게 한 유일한 돌파구는 친구들과 즐기는 축구였다. 벨레넨세스는 길거리 축구에서 비범한 재능을 뽐내던 페페의 잠재성에 반해 그를 영입했다.
페페의 데뷔전 일화는 지금까지 전설로서 추앙되고 있다. 1926년 2월 28일 벤피카전이었다, 당시 벨레넨세스는 무려 1-4로 끌려가는 졸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후반 30분 페페가 교체 투입되며 반전이 일어났다. 들어가자마자 해트트릭을 휘몰아치며 순식간에 스코어를 4-4로 만들더니, 종료 직전에 얻은 페널티킥까지 성공시켜 경기를 뒤집은 것이다. 페널티킥이 주어졌을 때 벨레넨세스의 선배 선수들이 부담감을 느껴 한사코 키커로 나서지 않겠다고 하자, 당당하게 키커로 자원해서 골을 넣어 승리를 안겼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벨레넨세스 처지에서는 어차피 경기를 망친 상태이니, 당시 만 18세 유망주였던 페페에게 경험치나 주자는 식으로 기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페페는 데뷔전에서 ‘영화’를 찍었다.
페페는 단숨에 스타플레이어가 됐다. 이듬해에는 곧바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됐고,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출전해 두 골을 터뜨리며 팀의 8강 진출을 이끄는 등 나름의 족적을 남겼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포르투갈 간판 골잡이로 자리매김했다. 벨레넨세스에서는 숫제 골 폭풍을 몰아쳤다. 1929-1930시즌에는 경기당 2.57골이라는 놀라운 득점 실력을 발휘했으며, 봉 수세소라는 클럽을 상대로는 홀로 열 골을 몰아치며 팀의 12-1 대승을 이끌기도 했다. 봉 수세소전에서 쏟아낸 열 골은 지금도 포르투갈 리그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페페는 다섯 차례 컵 우승을 안기는 등 벨레네센스의 복덩이가 됐다. 요컨대 1920년대의 에우제비우 혹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였던 선수가 바로 페페였다.
그런데 커리어 내내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페페는 비극적이게도 23세에 사망했다. 1931년 10월 29일, 페페는 선반 공장에서 일하다 갑작스레 극심한 복통을 호소하며 병원에 호송된 후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사족을 달자면, 페페가 공장에서 쓰러진 건 생계 때문에 생업에 종사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포르투갈에는 프로 관념이 없었다. 페페의 장례식에는 3만여 팬들이 모여 추모했으며, 이웃 국가 스페인의 간판 골키퍼였던 리카르도 사모라까지 참석해 애도했다고 한다.
페페가 난데없이 죽음을 맞이한 이유는 식중독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식중독에 걸렸는지는 명확하게 알려진 바 없다. 하지만 유력한 ‘설’은 있다.
문맹이었다는 어머니의 실수 때문이라는 얘기다. 페페의 어머니는 출근을 준비하던 아들을 위해 이베리아 지역의 전통 소시지인 초리소를 요리했다. 소금에 절이는 소시지 요리이기 때문에 당연히 소금이 첨가되어야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녀는 언뜻 보면 소금과 구분이 안 가는 수산화나트륨을 소시지에 넣었다. 이 수산화나트륨은 이른바 가성소다라 불리는 독극물이다. 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겠다는 선의가 비극이 되고 만 것이다.
벨레넨세스는 이 어이없는 사망 소식에 좌절했다. 자신들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으니 당연했다. 벨레넨세스는 페페가 사망한 이듬해 당시 홈이었던 캄포 데 살레시아스에 페페의 이름을 헌정하고, 조각상을 만들어 페페를 추모했다. 그 조각상이 훗날 이스타지우 헤스텔루의 정문으로 옮겨진 것이다.
한편 이 페페 조각상이 포르투갈의 빅 클럽 FC 포르투와 남다른 인연도 있다고 한다. 포르투 선수단은 벨레넨세스 원정을 올 때마다 추모 화환을 들고 페페 조각상을 참배한다고 한다. 포르투갈 언론 <마이스 푸치볼>에 따르면, 포르투 선수단이 페페 조각상 참배를 하는 이유는 딱히 없다고 한다. 그저 위대한 대선배를 잊지 않겠다는 존경의 표시라고 하는데, 포르투를 제외한 다른 포르투갈 클럽들은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꽤나 흥미롭게 비친다.
혹자는 벨레넨세스와 포르투의 유대 관계가 매우 돈독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같은 블루 컬러를 내세우는 이 두 팀은 과거부터 끈끈한 관계를 맺어왔다고 한다. 벨레넨세스는 1973년 경기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던 포르투의 주장 파방의 기념관에 화환을 보내는 등 포르투가 페페에게 보인 선의와 존경심에 화답하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페페의 조각상을 끝으로 포르투갈에서 머문 즐거웠던 시간을 마무리하게 됐다. 오렌지 향이 가득한 스페인의 고도(古都) 세비야로 향하는 야간 버스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