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 아구아스·조세 아우구스토 등 황금 세대를 배출하기 시작한 벤피카가 유럽 정상을 넘볼 만한 실력을 갖추면서 큰 인기를 끌자, 살라자르는 이를 이용하려 했다. 축구가 정권 유지에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살라자르 정권은 포르투갈 리그의 프로화를 지시했다. 특히 당대 최강 벤피카를 정권을 대표할 클럽으로 지목해 지원하려 했다. 일각에서 스포르팅 CP 유스였던 에우제비우가 홀연히 벤피카로 건너와 프로 데뷔한 것도 살라자르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썰’도 있다.
이 썰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떠나, 벤피카가 살라자르 정권 시절 포르투갈을 넘어 유럽의 헤게모니를 손에 넣은 팀이 된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 두고 라이벌 스포르팅과 포르투는 벤피카를 ‘독재자가 사랑한 클럽’이라고 지금껏 비판한다. 1950년대까지 ‘양대 명문’이었으나 1960년대 들어 현격한 격차로 밀리게 된 리스본 맞수 스포르팅 지지자들이 특히 그렇다.
그렇다면 벤피카 지지자들의 반응은 어떠할까? 당연히 독재자가 사랑한 클럽이라는 평가에 펄쩍 뛰며 불쾌해한다. 사실 억울할 법하다. 프란시스쿠 피네이루 코임브라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를 비롯한 다수 포르투갈의 석학들은 “축구는 포르투갈에서 늘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특히 엘리트 계층으로부터 핍박받는 노동자 계층이 정말 사랑하는 종목이었다. 그러나 살라자르는 축구라는 종목에 큰 애정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살라자르는 축구와 벤피카의 가치에만 주목했을 뿐이었다. 벤피카 지지자들도 이용당했기 때문에 도리어 자신들을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벤피카 지지자들은 대단히 구체적 사례를 들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벤피카의 홈구장 이스타지우 다 루즈 @풋볼 보헤미안
첫째는 살라자르는 벤피카의 붉은 팀 컬러를 바꾸려 했다. 자신이 혐오하던 ‘공산주의 맹주’ 소련의 색깔과 같았기에 정권의 상징이었던 청색과 흰색이 조합된 유니폼을 강요한 것이다. 그러나 벤피카는 갖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붉은 팀 컬러를 지켰다.
둘째는 당대의 벤피카 회장들은 모두 반(反) 정부 성향의 정치인이었다는 점이다. 벤피카 지지자들은 클럽의 정신적 기둥을 세웠다고 평가받는 펠릭스 베르무데즈를 비롯한 여러 회장이 살라자르 정권의 비밀경찰 PIDE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PIDE는 벤피카 회장 선거 때마다 감찰하며 관제 선거로 유도하려 했다. 최고 인기 클럽인 만큼 친정부 성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인물을 회장으로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 벤피카 회장 선거에서는 늘 반정부 성향 인사가 당선됐다. 벤피카 팬들은 벤피카가 정권에 순응하지 않는 노동자 계급의 클럽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셋째는 바로 에우제비우를 향한 살라자르 정권의 대우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 1960년대 에우제비우는 펠레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로 평가받는 선수였다. 벤피카를 포르투갈 프리메이라리가의 지존으로 올려놓고, 나아가 유럽 정상에도 밀어 올린 슈퍼 레전드였다. 그런데 벤피카 지지자들은 이 에우제비우가 살라자르 정권의 공작 때문에 더 나은 커리어를 구가할 수 없었다고 한다.
벤피카와 포르투갈의 슈퍼 레전드 에우제비우 동상 @풋볼 보헤미안
에우제비우는 전성기 시절 벤피카보다 더 큰 클럽으로부터 숱한 영입 제안을 받았다. 1966년에는 인터 밀란이, 1967년에는 이탈리아 최고 명문 유벤투스가 큰 관심을 보였다. 벤피카와 에우제비우도 적극적으로 호응해 유벤투스가 제시한 서류에 사인한 적도 있다. 지금껏 그저 에우제비우가 벤피카에만 충성을 바친 ‘원 클럽 맨’으로 여겼을 이들이 많았을 터인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에우제비우는 왜 벤피카를 떠나지 못했을까? 살라자르 정권은 당시 식민지에서 독립을 천명한 신생 국가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때 식민지 중 하나였던 모잠비크 출신 스타 에우제비우를 포르투갈의 선전 도구로 쓰고자 했다. 살라자르는 에우제비우를 포르투갈 밖으로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에우제비우가 포르투갈의 일원으로서 1966 FIFA 잉글랜드 월드컵 본선에 출전했을 때, 같은 대회에 출전했던 이탈리아의 축구계 인사들이 에우제비우 영입을 위한 협상 테이블을 마련할까 봐 공작을 통해 무산시켰다는 이야기도 남아있을 정도다.
에우제비우와 동시대에 활약하며 포르투갈과 벤피카의 첫 번째 화양연화를 이끈 레전드 안토니우 시모에스가 훗날 남긴 증언에 따르면 선수들은 계약된 보수의 60%밖에 받지 못했고, 그 보수의 수준도 일반직에서 일하는 이들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몇몇 선수는 레스토랑에서 테이블을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야 훈련을 할 수 있었단다. 심지어 프로 선수였던 탓에 보험 등 사회 보장 제도 가입도 여러 이유로 어려웠다. 파업 등 여러 수단을 통해 저항하면 곧장 탄압이 들어왔다.
벤피카 지지자들은 이 밖에도 벤피카가 살라자르 정권에 반발했다는 증거는 숱하게 많다며 라이벌 팬들이 붙인 ‘독재자가 사랑한 클럽’이라는 오명은 억울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도리어 벤피카 지지자들은 리스본 벨렝 지역을 연고로 하는 벨레네센스와 포르투가 친 살라자르 클럽이었다고 지목한다.
포르투갈 민주화 운동인 카네이션 혁명 @풋볼 보헤미안
교활한 독재자 살라자르의 최후는 매우 황당하다. 1968년 휴양지에서 그물침대와 함께 여유를 즐기다 바닥에 떨어져 뇌출혈을 일으켰다. 이 사고 때문에 수일 동안 정신을 잃었고, 그 사이 훗날 후임 총리가 되는 마르셀루 카에타누 등 정치적 동지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다 의식을 되찾았는데, 사고 때문에 실각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 것을 염려한 측근들이 여전히 살라자르가 총리로서 실권을 휘두르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조작된 신문과 가짜 서류를 보고하며 안심시켰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살라자르가 평상시 외부와 접촉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살라자르는 측근이 전하는 신문 이외에는 사회 정세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1970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이 포르투갈 총리인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말년에는 현실 속에서 가상현실을 살다 간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살라자르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카에타누 정권 역시 얼마 못 가 실각했다. 1974년 4월 25일,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났다. 무모한 식민지 유지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젊은 장교와 병사들이 카에타누 정권을 끌어내리기 위해 봉기했고, 포르투갈 시민들이 병사들의 총구에 카네이션을 꽂아주며 그들을 절대적으로 지지한다는 뜻을 내비친 민주 혁명이다.
단 한 명의 피도 흘리지 않고 민주화 정권이 들어선 역사적 사건이었고, 이때 시민들과 함께한 이들 중 한 축이 바로 벤피카·스포르팅 등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축구 클럽과 그들의 지지자들이었다.
“혁명 직후 선수 노조 활동을 인정받았다. 선수들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계약을 할 수 있었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더 많은 동기 부여를 얻을 수 있었다”
앞서 소개한 시모에스는 포르투갈 사회를 뒤바꾼 카네이션 혁명이 축구계에 준 긍정적 영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선수들의 처우만 좋아진 게 아니다. 포르투갈 클럽들은 민주 정권이 들어선 후에야 정상적 성장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에우제비우가 이루지 못한, 더 큰 성공을 열망하는 선수들이 나온 것도 그 이후의 일이다. 그저 독재 정권에 이용만 당하며 상처 받았던 포르투갈 축구의 진정한 발전은 족쇄가 풀린 이후에야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