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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Sep 16. 2021

벤피카는 독재자의 클럽인가?

'Mr. 트레스 F' 살라자르는 누구인가?

포르투갈 최고 명문 벤피카의 상징화. 독수리는 아귀아 빅토리아로 불린다. 실제 독수리 킥오프 쇼를 펼치는 걸로 유명하다. @풋볼 보헤미안

이 화두에 관심을 가진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포르투갈 최고 명문 ‘붉은 독수리’ 군단 벤피카를 둘러싼 이야기다. 포르투갈을 방문하기 전 에우제비우를 필두로 포르투갈 최고의 스타들을 두루 배출한 이 클럽이 독재자의 후원을 받았다는 ‘썰’을 현지의 한 웹 사이트를 통해 접했었다. 반대로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는 이들의 주장도 상당히 많았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일까?     


몇몇 팬들은 포르투갈의 이웃나라 스페인 얘기 아니냐고 되물을 듯하다. 레알 마드리드·바르셀로나 등 여러 클럽의 역사에 영향을 끼친 프란시스코 프랑코 전 스페인 총통 얘기 아니냐고 묻는 식자(識者)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축구계에 끼친 영향으로 따지면 외려 이쪽이 더 원조에 가깝다. 포르투갈을 36년간 철권통치한 독재자 안토니우 살라자르, 1960년대 레알 마드리드를 밀어내고 유럽 정상에 올랐던 벤피카의 화양연화는 이 살라자르의 강력한 후원 덕분에 가능했다는 썰이 현지에서 떠도는 것이다.


과연 벤피카의 ‘막후’로 지목된 살라자르는 어떤 인물일까? 앞서 언급한 프랑코 총통은 꽤 유명하다. 아돌프 히틀러의 ‘절친’이자, 교활한 외교술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몸을 뺀 후 스페인 내전서 무력으로 정권을 잡아 숨 막히는 독재를 펼친 인물로 한국에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프랑코 총통과 이웃 사이였던 살라자르는 세계 정치 외교 근현대사에 정통한 이가 아니라면, 특히 축구 팬들에게는 낯선 인물이다. 그래서 이 인물에 대한 소개가 먼저 일 듯하다. 개인적으로도 이 점이 궁금해 벤피카의 홈 이스타지우 다 루즈가 아닌 리스본 시내에 가까운 곳에 자리한 알쥬브 저항과 자유의 박물관(Museum Aljube Resistência e Liberdade)을 먼저 찾았다.

포르투갈의 독재자 살라자르 @풋볼 보헤미안

20세기 초반 전 유럽에는 개인의 개성을 말살하고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무조건적 충성과 종속을 강요하는 전체주의, 이른바 파시즘이 광풍을 일으켰다. 나치스를 이끌고 독일을 집어삼킨 히틀러, 파시스트당을 앞세워 이탈리아를 먹은 베니토 무솔리니와 마찬가지로 전 유럽에 파시즘을 강령으로 내세우는 리더들이 유럽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포르투갈에서는 독특한 정치적 현상이 발생했다. 1926년 포르투갈 제1공화국이 육군 장교 오스카르 카르모나의 쿠데타로 멸망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당시 코임브라 대학에서 명망 높은 경제학 교수로서 활동하고 있던 살라자르였다.      


살라자르는 대통령에 자리한 카르모나의 재무장관으로 기용되면서 정치계에 발을 디뎠다. 당시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던 대공황의 여파가 포르투갈에도 미쳤는데, 살라자르는 자신의 경제학 지식을 바탕으로 한 정책을 통해 포르투갈 경제를 수렁에서 건져 올리며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인기를 바탕으로 1932년 총리에 오르며 실권을 장악했고, 이후 36년에 달하는 독재를 이어갔다. 물론 카르모나 대통령과 같은 ‘명목상 상급자’가 있긴 했지만, 살라자르 정권에서 대통령은 그저 거수기로 전락한 신세였다.      


살라자르는 이념적으로 당시 유럽의 주류 정치 이념 중 하나 파시즘에 썩 동감하진 않았다고 한다. 살라자르는 파시즘이나 나치즘을 두고 “이교도적인 제국주의”에 불과하다는 촌평을 남겼다. 그저 권력을 얻을 때 우군이었던 포르투갈 파시스트 진영을 중용하고 정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이웃 나라의 파시즘 정권에서 활용하는 정적 제거, 민간인 사찰, 언론 조작, 불법 체포 등 독재적 정책을 다수 흡수했을 뿐이다.      


흥미로운 건 히틀러나 프랑코와 달리, 앞에 나서지 않는 ‘은둔형 독재자’였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자신을 대리할 누군가를 내세운 대신 막후에서 모든 일을 기획하는 걸 선호했다. 시스템적으로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모든 것을 제거했다. 또한 삶 자체도 외부와 접촉을 꺼리는 극도로 폐쇄적 인생을 살았다. 종합하자면 살라자르는 그저 정치 체제는 아무래도 좋은, 권력에 집착하는 독특한 성향의 독재자였다고 할 수 있다.     

살라자르는 트레스F라는 우민화 정책으로 유명하다 @풋볼 보헤미안

이 살라자르를 언급할 때 꼭 언급되는 정책이 있다. 바로 우민화다. 당시 유럽은 산업화를 통해 고도로 발달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수많은 이념과 철학이 제시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말인즉슨 사람들의 지적 수준이 그만큼 높아졌고, 이슈를 둘러싸고 격렬한 토론이 오가는 분위기가 자연스레 형성됐다는 뜻이다.  그러나 포르투갈에서는 그저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살라자르는 똑똑한 사람이 많으면 정권 유지가 피곤하니 차라리 국민들을 멍청하게 만들자는 한심한 정책을 펼쳤다. 사회적 논의를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 여겼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초등 교육 등 기본적 소양만 가르칠 뿐 고등 교육을 가르치지 않으려 했다. 지식인을 탄압하면 전 세계적으로 지탄을 받는다. 그러나 무지한 자가 대다수라면 논쟁이 빚어지지 않고, 자연히 권력층에서 대중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이유도 없다. 살라자르는 그 점을 주목했다. 정권을 유지하겠다고 국민들을 ‘무식한 사람’으로 만들려 한 것이다.      


이 여파로 아동 문맹률은 1960년대에 이르러 무려 90%가 넘어서는 일까지 빚어졌다. 여기에 대중들이 정치적 혐오 혹은 무관심하길 바랐다. 그때 시행한 정책이 바로 3F, 포르투갈어로 ‘트레스 F(Tres F)’ 정책이다. 3F는 축구(Futebol), 파티마(Fatima)의 성모 발현을 통한 가톨릭 신앙 결집, 포르투갈의 전통 가요인 파두(Fado)를 말한다. 1980년대 한국 군사 독재 정권에서도 이 3F를 차용한 우민화 정책을 시행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정치에 쏠릴 수 있는 대중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일환이다.      


살라자르와 포르투갈 축구 발전 이야기는 바로 이 트레스 F에서 출발한다. 1940년대만 해도 포르투갈 축구는 자국 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스포츠임에도 불구하고 프로화가 진행되지 못했다. 포르투갈이 잉글랜드·독일·이탈리아와 달리 축구사 초창기에 역량을 발휘할 수 없었던 이유기도 하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어두운 사회상을 잊고 순간의 즐거움을 즐기려는 수많은 인파들이 축구 경기장에 몰렸다. 물론 벤피카의 홈에도 팬들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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