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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Oct 16. 2021

포기 없는 삶,
보통 삶을 살다 영면한 수호신

옛 라요 바예카노 GK 윌리 이야기

인종차별주의 반대를 주장하는 라요 바예카노 팬들의 상징 윌리

어느 나라든 막론하고 축구계 내에 존재하는 씁쓸한 현실부터 얘기하려 한다. 외국인 선수는 정말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맹활약을, 그것도 오래도록 펼치지 않고서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대개 금세 잊힌다. 또, 외국인 선수는 기본적으로 자국 선수보다 한 차원 높은 기량을 가질 것을 요구받기에 잘하는 건 당연한 것으로 치부된다. 반대로 기대에 못 미치면 언제든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처지다. 하루하루가 생존이 걸린 사투를 벌이는 선수들이 바로 외국인 선수다.     


그래서 외국인 선수가 이 핸디캡을 극복하고 팬들로부터 오래도록 추억된다면, 그는 진정 성공한 선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유랑기에서 거지가 경기장 내에 살고 있을 정도로 주변 환경이 열악하다고 소개했던 라요 바예카노에 바로 그런 선수가 있다. 현역 시절 국제적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한 나이지리아 출신 골키퍼 윌프레드 아그보나바르의 이야기다. 현지 팬들에게는 ‘윌리’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이 선수는 캄포 데 바예카스 정문에 새겨져 영원한 삶을 살고 있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진 바 없는 선수인 만큼 소개가 먼저일 듯하다. 윌리는 1983년 나이지리아 클럽 뉴 나이지리아 뱅크에서 데뷔해 1990년까지 나이지리아에서만 뛰었다. 우승 이력은 없지만, 자국 내에서는 톱클래스 골키퍼로 평가를 받았다. 유럽 빅 리그 진출 여부를 떠나 나름의 인정을 받으며 편한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었던 선수였다.      


하지만 큰 무대에서 뛰고 싶다는 열망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1989년 잉글랜드 풋볼 리그 2(2부리그) 소속이던 브렌트포드에서 견습생 자격으로 유럽 축구를 경험하고 나이지리아로 돌아온 윌리는 1년 후 유럽 클럽에 들어가겠다는 일념으로 사비를 들여 유럽행 비행기에 오르는 큰 도전을 감행했다.     


스페인 곳곳을 떠돌며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에스파뇰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던 카메룬 출신 수문장 자크 송고라는 성공 사례가 있긴 했지만, 그때만 해도 아프리카 선수들의 스페인 리그 진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이은 낙방으로 지쳐갈 때, 현지 코치의 추천 덕에 연이 닿을 수 있었던 팀이 당시 세군다 리가에 속해 있던 라요 바예카노였다. 테스트를 통해 긍정적인 답을 받은 윌리는 바로 이 팀을 통해 유럽 진출의 꿈을 이뤘다.     


유럽 진출의 꿈을 이뤘다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처음 3년은 심히 힘든 시기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라요 바예카노는 큰돈을 쓸 수 있는 팀이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윌리는 라요 바예카노로부터 최소 생계 정도의 월급과 거주할 수 있는 작은 집 정도를 받았을 뿐이었다. 어찌 보면 구단이 선수에게 ‘열정 페이’를 강요한 셈인데, 그런데도 윌리는 꿈을 위해 꾹 참고 묵묵하게 주어진 소임을 다했다.      

캄포 데 바예카스 정문 1번 게이트에 그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풋볼 보헤미안

라요 바예카노의 라 리가 승격에 일익을 담당했으며, 이를 통해 명성을 얻어 1994 FIFA 미국 월드컵에 출전한 나이지리아의 최종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맛봤다. 흔히 말하는 ‘연습생 신화’를 만들어낸 셈이다. 1996년 팀을 떠나기 전까지 라요 바예카노에서 7년을 뛰었다. 이 시기의 라요 바예카노 팬들에게는 ‘아이콘’ 중 하나였다. 클럽을 위해 실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대개 팀 상황이 나빠지면 다른 마음을 먹는 경우가 많다. 사실 당연한 반응이다. 개인 실력이 뒷받침된다면, 수준 높은 1부 리그에서 가능한 오래도록 뛰고 싶어 하는 게 지극히 정상적이다. 하지만 윌리는 달랐다. 윌리는 라요 바예카노와 함께 1부 리그 승격을 경험했고, 2부 리그 강등이라는 아픔도 맛봤다. ‘엘리베이터 클럽’이라는 열악한 현실을 온몸으로 체감한 선수였지만, 그걸 원망하지 않았다.      


심지어 경쟁에서 밀려도 마찬가지였다. 1995-1996시즌 새 감독이 오면서 입지가 줄더니 부상까지 당한 후 순식간에 주전 자리도 잃었다. 그래도 벤치를 지키며 끝까지 팀을 위했다. 뛰든 안 뛰든, 높은 무대든 아니든 윌리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계약 만료로 팀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에게 귀중한 기회를 준 라요 바예카노와 의리를 끝까지 지킨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안티 파시즘’, ‘인종 차별주의 반대’ 성향을 가진 라요 바예카노 팬들에게 아픈 손가락 같은 선수였다. 실제 사례를 들겠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벌어진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서 윌리는 ‘검둥이(negro)’라는 비열한 악담을 끊임없이 들어야 했다. 


이 사건은 당대에 꽤 시끄러운 잡음을 일으켰는데, 자신의 선수가 공격을 받는 걸 가만 보고 있을 이들이 아니었다. 그 어느 선수보다도 큰 목소리로 응원하며 윌리에게 힘을 불어넣으며 맞불을 놓았다. 이런 일화 때문에 윌리는 라요 바예카노 팬들의 정체성을 강화시킨 선수로도 평가받는다.     

라요 바예카노 팬들의 정치적 성향은 좌파적 무정부주의라고 한다 @풋볼 보헤미안

그런데 여기까지만 보면 ‘흔한’ 축구 레전드의 일생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보다 더 대단한 레전드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도 윌리가 라요 바예카노 팬들에게 더 큰 박수를 받은 이유가 있다. 은퇴 이후의 행적 때문이다. 보통 이처럼 박수받고 팀을 떠나게 된 선수는 지도자로 변신할 때 후원을 받거나, 아예 클럽 수뇌진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윌리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 정도로 남루하고 힘든 삶을 보냈다.     

은퇴 후, 윌리는 스페인 무대를 처음 밟았을 때 맛봤던 고난을 다시 되풀이했다. 축구 지도자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한 건 아니었지만, 선수 시절만큼 보수가 넉넉지 못하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대목이 있다. 윌리는 현역 시절 돈을 방탕하게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윌리는 꿈을 위해 라요 바예카노가 준 적은 보수를 감수해야만 했다. 오로지 꿈만 보고 뛰었다.     


윌리는 그래도 좌절하지 않았다. 윌리는 은퇴 후 라요 바예카노의 홈구장인 캄포 데 바예카스 인근에 아내와 함께 정착했다. 그리고 투잡을 뛰었다. 낮에는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고, 저녁에는 주요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이러한 초라한 삶은 한때 스페인 언론으로부터 주목받았는데, 그는 한 방송에서 “인생은 정말이지 매우 힘들다(la vida es muy, muy, dura)”라고 힘든 삶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 모습이 마드리드 바예카스 지역민들, 즉 라요 바예카노 팬들에게는 달리 보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워너비’였던 선수가, 그것도 외국인이, 은퇴 후에는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는 단순히 레전드가 아니라 지역 사회에 깊이 파고든 일원으로 인정받았다. 그게 본의든 아니든, 윌리는 그때부터는 더는 이방인이 아닌 ‘마드리디스타’이자 ‘로스 바예카노스’였다.     


이 때문에 2015년 1월 윌리가 골수암 판정을 받았을 때 마드리드 전체가 깊은 슬픔에 빠졌다. 라요 바예카노 팬들은 모금 운동까지 벌였으며, 지역 라이벌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팬들도 홈 라요 바예카노전을 맞아 ‘Fuerza Wilfried(힘내라 윌프레드)’라는 플래카드를 내걸며 그의 쾌유를 빌 정도였다. 하지만 이미 병세를 호전시키기엔 너무 늦은 상태였다. 골수암 판정을 받은 지 3일 만에 윌리는 영면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라요 팬들이 참석했다. 캄포 데 바예카스에 윌리의 얼굴이 새겨진 건 바로 그 이후의 일이다. 주전 골키퍼를 뜻하는 등 번호 1번을 의식해서인지, 팬들은 정문을 뜻하는 ‘1번 게이트’ 바로 옆에 윌리의 얼굴을 새겨 넣었다.      


윌리가 클럽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였는지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윌리가 팬들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골키퍼였던 건 분명하다. 한평생 고난 속에서 도전만을 거듭한 보통 사람을 너무 닮은 골키퍼, 그가 바로 윌리였다.

Eterno Willy. 영원히 윌리를 기억하겠다는 라요 바예카노 팬들 @풋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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